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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13. 2015

햇빛 쨍쨍한 인도의 시작

나마스떼, 인디아!

  인도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무얼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실제 인도 자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인도 한 모금을 함께 마시고 싶다.


  인도에 와서 처음 본 것들은 유쾌하다기보다는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시멘트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골까지 드러나 있는 건물들(그냥 그렇게 짓고 끝낸 거였다.), 벽마다 묻어 있는 흙먼지, 때가 끼어 지저분한 타일. 아버지께서 건축을 하시기 때문에 특히나 이 모습이 내게 무척 충격이었다.


  그리고 건물 앞마다 개들과 섞여 나뭇단 같은 몸을 거적으로 덮고 누워 있는 노숙자들, 집 바로 앞에 있는 힌두 사원에서 아침저녁으로 두어 시간씩 틀어 놓는 (그래서 이제는 외울 것 같은) 정신 사나운 음악, 타고 남은 재 같은 모습으로 폭삭 앉아 있는 거지들, 차에 타고 있어도 낯선 외국인을 쫓아오는 날카로운 시선들까지.


  게다가 정전은 일상 용어에, 건조한 공기엔 흙먼지가 어찌나 날리는지 입 안에서 한 번씩 자근자근 흙이 씹히기도 하고, 수도에서는 석회수가 나와 머리카락도 피부도 다 뒤집어졌다. 그나마도 깨끗한 물이 아닌 듯, 일주일이면 반짝거리던 새 플라스틱 물양동이에 까만 때가 낀다.


  그러나 나는 이 곳에서 행복하다. 늘 기르고 다듬어 매니큐어를 바르던 손톱을 아프도록 짧게 깎고, 양말 벗기 싫어하던 발로 흙먼지를 밟고 다닌다. 이렇게 작은 습관들이 변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마냥 행복하게 지냈다. 여기는 분명 공기 중에 날리는 흙먼지만큼 웃음도 가득 날리고 있는 곳이다.


바쁘고 활기찬 아침 시간이지만 골목이라 적당히 한적하던 우리 집 앞.


  그런데 참 행복한 나는, 역설적으로 많이 울기도 하고 있다. 정해 놓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추이를 보면 보통 일주일의 반은 웃으면서, 반은 울면서 하루를 마치는 것 같다. 감정 기복이 널 뛰듯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여느 때보다도 일정한 선을 그리는 감정으로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한숨처럼 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은 곳이라.


  나는 이곳에서 지난 1월에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분쟁 피해 어린이들이 사는 집에 살고 있다. HIV/AIDS 사업장으로 간다더니 웬 어린이집? 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 아이들도 NGO와 결연 아동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두 일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틀밖에 참여하지 않은 HIV/AIDS 사업장사람들보다 여기 아이들에게 더 정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두 곳 다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내게 감사한 특권이었다.


  나의 하루는 보통 7시쯤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씻고 옷 갈아입고, 10시에 간사들끼리 모임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공식적으로는 빈 시간이다. 3시 반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그 전까지는 할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없으면 쉬기도 한다. 청소, 빨래 같은 개인의 일도 있고 때로는 야채 다듬기, 냉장고 청소, 번역이나 서류 작업, 보고서 작성 등 주어지는 일도 있다.


  또 한국에 있는 그리운 사람들과 연락을 하기도 하고, 같이 있는 간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간은 정말 금방 간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교복 애벌빨래를 한 다음, 놀거나 숙제를 하고 공부도 한다. 그 내내 간식을 챙기고, 저녁 식사를 챙기고, 아픈 아이가 있으면 돌보고, 숙제를 잘 하고 있는지 공부하다가 도움이 필요한 건 없는지 돌아보는 건 모두 간사들의 몫이다.


  9시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나는 또 이렇게 지금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못 다한 일을 하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빡빡한 일정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하루가 정말 금방 간다.


  그 내내 나는 ‘디디’라고 불린다. 언니 혹은 누나라는 뜻이다. 어감도 예쁘고 뜻도 좋아서 나는 디디라고 불리는 게 좋다. 여기선 발음하기 어려운 한국 이름을 살짝 틀어, 내 이름은 써니 디디가 되었다. 나는 내 이름도 좋았다. 햇빛 쨍쨍한, 맑은 날들을 걷는 것만 같아서.


  그 맑은 날 중 이틀은 HIV/AIDS 사업장에 나간다. 주 이틀이라고 하면 적어 보이지만 사실 다이나믹한 걸로는 이 2일이 나머지 5일을 다 합친 것보다 더했다.


  HIV/AIDS 사업장으로 들어가는 나의 각오는, 한동안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애용했던 성경의 한 구절이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그리고 어쩐지 그 각오대로 많이 웃고 많이 울게 된 나를 본다.


  내가 온 이곳, 이 도시에서 에이즈 사역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동네 아저씨’들과 그 가족들은 Love in Action이라는 팀 이름을 갖고 있다. 에이즈 팀이라고 하면 현지인 간사들이 에이즈인 것으로 오해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팀 이름을 정했다. 멋진 이름이다. 정말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것,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그래서 이 팀에서는 환자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고 무슨 일이 있으면 돕는 등 정말 ‘친구’가 되어 산다.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삶이다.


  정례화된 업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환자에게 필요가 보이면 무슨 일이라도 돕는다. 그 전에는 대부분의 환자 가정이 화장실 없는 집에 살지만 이웃들이 화장실을 공유하기를 꺼려한다는 점에서, 화장실을 지어주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또 그때그때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새로운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우선 수요일마다 HIV/AIDS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클리닉에 가서 일을 돕는다. 이 도시에서 몇몇 사람이 뜻을 모아 HIV/AIDS 사람들을 위해 만든 클리닉으로, 클리닉 이름은 지방 언어로 ‘소망’이라는 뜻이다. 큰 병 진단을 내리거나 수술을 하는 큰 병원은 아니고, 몸 상태를 살펴 주고 그에 맞게 약을 처방해 준다.


  우리나라 동네 병원 정도로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HIV/AIDS에 대한 연구와 리서치, 생활 지침 등에 대한 교육 등도 하고 있다는 정도다. 그래서 한쪽에는 과학실에서 보던 도구들을 늘어놓고 리서치와 연구를 하는 연구실, 커리큘럼을 짜서 강의를 하고 교육을 하는 공간도 있다.


  또 아이들 놀이방이 있는데, 단지 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교육을 한다. 교육 내용은 대충 우리가 어렸을 때 듣는 얘기들과 비슷하다. 맛있는 거 준다고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마라, 혹시 엄마가 불렀다고 하더라도 전화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따라가면 안 된다, 누가 몸을 만지려고 하면 못 만지게 해라, 같은 얘기들이다. ‘만의 하나’를 위해, 쓸 일이 없길 바라며 하는 교육이지만, 아동 납치 사건이 워낙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교육을 한다.


  여기 온 지 한 달 차, 지금까지 클리닉에 3번 가 봤다. 첫 날은 사람들을 소개받고 구경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려니 하며 하루를 하릴없이 보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아이들 놀이방 담당자가 부재중이어서 그 자리에 앉았다. 그 날 따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아이들이 딱 두 명 들어왔다.


  둘이 나란히 오길래 자매인가 했는데 아니란다. "너네 같이 오지 않았어?" 물으니 대답한다. 같은 고아원에서 왔다고. 6살짜리 아이는 진료가 길어지는지 들어오지 않고, 13살짜리 아이와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담담하게, 실제론 너무나 길었을 이야기를 한 마디로 말해 주었다.


“5살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고아원에 산 지 3년쯤 됐어요. 아, 저 오빠도 있어요.”

“오빠랑은 같은 고아원에 살아?”

“아뇨. 다른 곳에 살아요.”

“그럼 너는 오빠를 못 만나?”

“가끔 만나요. 가끔.”


  이야기를 이어 가던 중 아이의 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보니까 유치 하나가 흔들려서 뽑히기 직전 상태로 덜렁이고 있는데, 그걸 뽑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그 뒤에 영구치가 이미 나서 자리까지 잡은 거였다.


  아이가 35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하나하나 신경 쓰기 쉽진 않을 거라는 걸, 나도 20여 명의 아이들과 살고 있으니 잘 알고는 있지만… 꼭 이가 앞 뒤로 두 개 난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이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는 흔들리는 이를 뽑기가 무섭다고 했다. 아마 간사들이 보지 못하게 감추고 있었던 듯싶었다. (우리 집 애들도 입을 한 번씩 벌려 보라고 해야겠군, 생각했다.)


  너 그거 하나도 안 아프고 뽑힐 건데 뽑지 않으면 더 아플 거라고 겁을 줬더니 그럼 집에 가서 하겠다며 시선을 피한다. 시설에 있는 어른께 꼭 보여 드리라고, 하나도 안 아플 거라고, 다음에 올 때 내가 검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이가 이를 뺐을지는 모르겠다.


  긴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6살 아이는 집에 가자는 ‘엉클’의 말에 기분이 좋았는지 활짝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이렇게 낯선 아이가 나를 이렇게나 꼭 안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놀라면서도 기뻐서, 6살 아이와 13살 아이 둘 다 꼭 안아 주고 보냈다.


  다시 할 일이 없어져 엉망으로 꽂혀 있는 책을 정리하는데, 키가 나보다 한 뼘이나 작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와 말을 걸었다. 정리에 막 집중하던 차에, 그것도 아이들 방에 들어온 성인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지만 말을 걸어온 사람이니 그냥 가볍게 인사로 받았다.


  영어를 전혀 못 하시는 분이었다. 보통 신기한 외국인 상대로 자기 영어 실력을 써먹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거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 접근은 좀 의외였다. 더듬더듬, 단어 하나씩 이어가면서도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으신 건지 계속 말을 걸어 오셨다. 서로 버벅거리고 더듬거리는 대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엄마. 아이.”

“애가 있으시구나. 몇 살인데요?”

“아니, 아니. 엄마. 아이. 엄마. 딸.”


  본인을 가리키며 엄마, 나를 가리키며 딸, 하시고는 연신 본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춰 내 볼이며 목덜미에 가져다 대곤 엄마, 딸, 그 두 단어만 반복하는 거였다.


“(그분이) 엄마고…제가 딸이라고요?”


  보통 대화라는 것에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말이 안 통해도, 맥락이 아무리 튄다 해도 초면에 이렇게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를 설정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닌지라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이걸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웃으면서 그냥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저는 인도인 엄마가 생겼네요.”


  그러자 환하게 웃더니, 진짜 모녀라도 된 듯 내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클리닉 곳곳을 자랑스럽게 가로질러 다녔다. 그리곤 다음에 올 때 음식을 해 오시겠다고, 이제 가야 한다고, 주섬주섬 인사를 했다. 그냥 ‘아,  가시는구나’ 하고 또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꼭 끌어안고 그 분을 보냈고 그 날의 일도 무사히 마무리했지만, 정말 그분 마음이 느껴진 건 그 다음 날 밤 집에 와서 일기를 쓸 때였다.


  그분이 혼자였다는 사실을 참 새삼스럽게도 깨달은 것이다. 여자 혼자서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 문화이기도 하고 부부가 모두 양성인 경우에는 클리닉에 같은 날 오는 게 편하기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분은 혼자였다. 에이즈 환자 중에는 병과 함께 덩그러니 남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 여자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이나 직업 생활 끝에 병 하나 얻고 혼자 덜렁 남은 여자에게 딸이라는 단어는 어떤 느낌일까,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 다음에 정말로 음식을 해다 주신다면 정말 딸이 된 것처럼 기쁘게 웃으며 먹어야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 소중한 마음을 흘려버리지 않고 정말 기쁘게 먹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에 오실까 했는데 오지 않았다. 보통 환자들이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오는 것 같다. 나도 어린이 방이 아닌 약국에 들어가서 처방전대로 약을 꺼내 담는 일을 했다. 사람도 많았거니와 나는 뭐가 무슨 약인지도 모르니 일일이 익히면서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배가 고픈지 지금이 몇 신지도 모르고 일을 한다. 한 번 꺼낼 때마다 작은 비닐봉투 하나씩 가득 차는 약들을 보며, 그 약을 받아 돌아가는 힘 없지만 엷은 미소를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건강히 지내시다 또 뵈어요.' 속으로만 되뇌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 달 차 클리닉 이야기. 아직 명확하게 정해진 포지션도 없고, 여전히 사람들의 이름은 하수구로 물 빠지듯 머릿속에서 스르륵 빠져나가 누가 누군지도 영 모르겠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일종의 직장 동료들처럼 되겠지. 2년쯤 후엔 이곳 사람들과, 이곳을 방문해서 웬 외국인 여자가 와 있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환자들과 어떤 관계가 될까, 기분 좋은 상상도 마구 해본다.


  여기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다. 아직 쓰지 못한 건 딱 하나, 환자 가정 방문이다. 나 혼자 온 것이었다면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골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그 집의 사정을 속속들이 듣는다는 건, 밖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어서 도저히 짤막하고 간단하게는 요약이 되지 않는다. 사실 널을 뛰듯 매일 눈물 바람으로 일기를 쓰게 되는 건 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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