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Sep 13. 2015

함께한 날의 일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유치원 때인지 초등학교 1학년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꼬물꼬물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내 서랍 한 구석에는 항상 일기장이 있었다. 그러나 방학 숙제로 검사 받은 일기장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의 날짜가 적힌 일기장은 전혀 없다. 어떨 때는 며칠에 한 번, 어떨 때는 몇 달에 한 번 하는 식으로 드문드문 꺼내는 식이었다.


  그래도 일기장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되어 주었다. 물건을 다 끄집어내고 방 정리를 하듯이, 속 시끄러울 때면 마음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들을 종이에 와르르 토하듯 쏟아 놓아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녹록한 것이 없었다.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같이 속이 상해 울고, 때로는 착잡했으며, 때로는 분노했다. 어떨 때는 상황이나 사람들 때문에 울화통이 치밀거나 답답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상황들을 접하고 돌아온 밤이면 그 날 그 날의 조각을 커다란 판에 이어 붙이는 것 같은 심정으로 일기를 썼다.


  분명히 얌전히 앉아 있다 왔는데도 언제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비행기가 사막에 불시착한 저녁의 파일럿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지친 감정 어딘가를 망치로 두드리고 열어 분해하고 다시 짜 맞추었다. 그렇게 일기를 써야지만 다음 날은 한층 정돈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개중에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날들을 돌이켜 보면 단연코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던 날들이다. 무거운 마음을 닻으로 드리운다는 생각으로 써 내려갔던 몇 개의 일기들.




2013년 10월 31일


  집이 만드는 엉성한 그림자에 기대어 마당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노인은 우리가 들어서자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집이라 하기도 옹색한 작은 방 안은 모든 것이 검댕을 뒤집어쓴 듯 빛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 한구석에서, 일주일 전 엄마를 잃은 아이는 원래 색이 밝은 자주색이었다는 것도 알아채기 힘들 만큼 새까맣게 때 낀 쿠션 하나를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고구마 색이라서 더더욱 누더기 같아 보이는 사리를 걸친 젊은 며느리는 아기를 끌어안고 연신 웃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웃으면서 고개만 숙여도 우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이 여자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그 얼굴을 살폈다.


  아기는 때 낀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방 안에 반짝이는 것이라고는 아기 딸랑이의 조악한 분홍색뿐이었다. 기저귀는 고사하고 팬티도 입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 통통한 팔목 발목에는 액막이 팔찌들이 잘랑거리고 있다.


  마당에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 간사들이 사진 한 장을 들여보내 주었다. 지난주에 세상을 떠났다는 여인의 모습이, 수사도 과장도 아니라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푸석하게 찍혀 있었다. 그 사진을 손에 쥐고서야 아이는 쿠션을 내려놓았다.


  채워지지 못해 불안해 보이는 손. 어느 책인지 공책인지를 열어 사진을 곱게 꽂아 넣고 또 방 한구석에 붙박이처럼 주저앉아 쿠션을 끌어안는다. 제 마음인 것처럼 끌어안는 양이 안쓰럽기만 하다.


  기껏해야 열서너 살? 하지만 아이는 우유 짜는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벌써 생업전선에 뛰어든 상태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아이는 내게 하이, 바이 두 마디밖에 건네지 못했다만, 그래도 낯선 외국인을 보는 아이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마냥 슬퍼하지 않아 다행인지, 아니면 더 안 좋은 건지… 이 일별만으로는 모르겠다.


  지난주에 아내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오토릭샤에 부딪히는 사고까지 당했다는 노인은, 꺼져 가는 불빛 같은 목소리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다. 마당에 서서 착잡한 눈을 감은 내 이마에서 햇빛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2013년 11월 13일


  오늘 아침에도 현지인 간사 차를 타고 클리닉으로 갔다. 가는 길에 태워 가야 할 환자가 있다고 했다. 결핵균에 감염이 심하게 되었는데 그게 시신경을 건드려서 눈이 먼 남자분이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고 전화 한 통을 하자 이윽고 나온 남자는… 뭐랄까, 분명 딸은 아닐 텐데 아내라고 말하기도 좀 뭣한 여자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이내 둘이 부부라는 건 분위기로 알 수 있었지만… 겉모습만 놓고 보면 모를 것 같았다.


  움푹 들어간 눈으로 허공을 보며,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죽음을 연상케 하는 신음 소리를 뱉어내는 남자 얼굴을 보고 제일 먼저 생각난 단어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였으니까.


  그래도 여자는 울 듯한 얼굴에 애써 띄운 것이 역력한 미소로 내게 인사를 했다. 여자의 팔목에는 털실 같은 것으로 만든 팔찌가, 남자의 팔목에 걸린 것과 같은 모양으로 감겨 있었다. 그리고 수심으로 삶을 보내왔다고 얼굴이 말해주는, 아마도 여자의 시어머니일 듯한 할머니.


  세 사람이 차에 오르고 나는 괜스레 긴장이 됐다. 꼭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처음 얼굴 볼 때는 정말 그랬는데… 참 이상하지. 별 대화도 없이 그냥 그 차에 실려 덜그럭거리는 내내, 우리는 그냥 멀리서 보면 한 공간에 들어있는 한 무리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우리는 모두 삶에 두 발 딛고 있는, 그냥 인간이라는 것.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클리닉에 도착했지만 그랬던 건 나뿐이었던 것 같다. 주사실 침대에 남편을 뉘인 여자의 얼굴에 엷게 덮여 있던 미소가… 그제야…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는 느낌.


  얼굴을 가리고 섧게 우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처연했다. 웃고 있던 때도 그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을 달고 있던 걸 봤던 듯한 착각마저 드는, 너무나 슬픈 그 얼굴은… 죽음에 덮여 빛을 잃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남편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유리 도자기처럼 소중히 대하는, 같은 팔찌를 나눠 낀 그 손길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남편을 덮으려는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갈 수만 있다면 그래 주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2013년 11월 14일


  오늘은 B의 집을 방문했다. B에게 과부라는 표현은 사실 적절치 않다. 근데 싱글맘, 또 이런 건 느낌이 다르고. 적당한 단어를 모르겠다. 아무튼 과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B의 남편은 어딘가 버젓이 살아 있으니까.


  B의 집에는 B의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2명, 남동생 1명, B의 세 살짜리 딸까지 일곱 명이 방 한 칸에 살고 있다. 인원을 대비해 보지 않아도 그냥 좁은 방이고, 그나마도 흙벽돌 움막 같은 집이다. 심지어 식기를 엎어 놓은 쪽에서는 얼핏 무슨 빗살무늬토기 같이 생긴 걸 보았다. 음, 잘못 본 거겠지...


  이미 결혼한 B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에이즈를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옮긴 HIV였는데, 그는 ‘이런 너랑은 살 수 없다’면서 아내와 딸을 버렸다.


  그뿐이 아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B가 막 낳은 갓난아이가 남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빼앗아 갔다. 그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양성인지 음성인지 검사를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처음부터 남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제 몸 상태에 대해선 숨기고 지참금 두둑이 뜯어가며 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정말 이건 말 그대로 ‘버린’ 거다. 처음에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 얘기를 듣고 나는 내가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몸 때문에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공부를 한 것도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닌 B이기에 일을 하더라도 남의 밭에서 일을 돕고 그 일한 만큼 야채를 받아올 수 있는, 단조로운 저소득뿐이다.


  집도 무척 외진 곳에 있는데 그런 B가 클리닉이나 다른 병원에라도 가려고 하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내가 잘 알아들은 건지 확신이 없는데, B가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 큰소리 치며 돈을 요구한다고 들은 것 같다. 아버지는 B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고. 양쪽의 입장이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잘 들었는지 몰라도, 아무튼 확실한 건 가족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B 어머니의 뒷모습. 마른 등에서는 가난과 싸워 온 처연한 냄새가 났다. B와 아버지가 푸념을 하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동생들도 상황이 좋지 않다. 일단 신부 지참금이 마땅히 없고, 어쩌다 혼담이 들어와도 언니 B의 병을 이유로 사람들이 기피해 여태 시집을 못 갔다고 한다. 하나는 일을 다니고 하나는 집에서 조카를 봐 주고 있었다.


  3살짜리 아이는 처음엔 마냥 부끄러워만 하더니 우리가 사 간 과자를 있는 대로 다 뜯어서 차으깨 넣고는 신나게 먹었다. 나중에는 반으로 깨진 나무 흑판을 가져와 쓸 줄 아는 유일한 글자 A, B를 써대다가, Love in Action 팀에서 주었다는 자동차 장난감을 이리저리 굴려 보다가…그러다가 내 핸드폰을 보고 흥분했다.


  성에 차지 않으면 제 물건도 이모에게 마구 던지는 아이에게, 보여주는 건 괜찮지만 쥐어주는 건 안 된다고 느꼈다. 주고 갈 물건도 아닌 다음에야. 그래서 자꾸 핸드폰에서 내 손가락을 떼어내려는 아이에게  No,라고 말하며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제 온 힘을 다해 꼬집고 할퀴고 때리고 난리가 났다. 3살짜리 손길이 뭐 얼마나 아팠겠냐만은, 그냥 조금 위화감이 있었다. 그냥 버릇없는 아이랑은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아이가 거칠고 어딘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느낌. 꼭 한 마리 야생동물을 보고 있는 느낌, 방치되었다는 느낌. 아이는 밥도 먹고 있고, 이모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놀아주곤 있지만 이미 어른들을 덮은 절망감과 분란이, 아이에게서 소망의 반짝거림도 안정감도 앗아가 버린 것 같은 느낌.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들었던 위화감. 아무튼 이상했다.


  얘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아이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면 차라리 좋겠는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이는 나를 껴안았다가 때렸다가, 무릎에 앉았다가 꼬집었다가, 갈팡질팡했다. 아이는 귀여웠지만… 내게 아직은 그런 아이가 익숙하지 않아서. 마냥 예쁘다곤 못하겠다. 시간이 가면, 조금 더 익숙 해지면 그런 아이들도 그냥 그 모습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들어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좋았던 건가, 아니었던 건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을 만나고 쓴 그날 그날의 일기들.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같이 속이 상해 울었으며, 때로는 분노하지만, 때로는 현상이나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좁은 내 모습도 있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놀랍도록 균형 잡히고 차분한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착잡해서 달달거리는 나와 달리, 물론 속상하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할 일을 해 나가는 다른 간사들을 보며 많이 배우고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NGO와 연결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연결을 할 수 있을지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아니면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는 걸까.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나는 부지런히 만나고 관찰하고 일기를 썼다. HIV/AIDS 환자들만 만난 건 아니다. 마주친 타인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하기를 바라며 썼던 일기는 다른 것도 있다.




2013년 11월 8일


  은행 가려고 오토릭샤에서 내렸을 때 마담,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불어도 아닌데 웬 마담, 해서 처음엔 그 말이 싫었는데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은근히 익숙해져서 어련히 날 부르는 거겠거니 하고 돌아본다.


  꼬마 거지가 서 있다. 같이 나간 디디가 걔를 알아본다. 저번에도 만났던 애, 디디들이 데려가서 밥 사 먹였다던 아이란다. 오늘도 그때와 같은 포장마차로 가서 닭고기 요리를 사고 망고주스까지 사서 안겨 주었다.


  이름이 데이비드(David)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여동생과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시설에 돈이 없는 건지 아니면 한창 때의 아이들이 배고파서 그러는 건지, 밤마다 여동생도 이 아이도 구걸을 나온단다.


  우리 집 아이들은 ‘오늘 밤 너무 춥다’고 스웨터에 털모자까지 푹 눌러쓰는 밤인데, 꼬질꼬질한 반팔 반바지에 거친 맨발. 제법 똘망해 보이는 인상의 아이인데 시선이 어딘가 불안하게 분산되어 있다.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영어도 제법 하는 것 같은데 쉬운 말에도 엉? 하고 되묻는다. 오들오들 떨고 이따금씩 콧물도 훌쩍거린다. 감기냐고 물으니 또 엉? 하고, 다시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마음 같아선 대신 추워 주고 싶다. 나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온 한국인이니까. 두꺼운 겉옷도, 신발도 있으니까. 네 대신 내가 추울 수 있다면.


  달라는 대로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어려운 얼굴 앞에서 어쩐지 괜히 목에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면서  속상해하는 것밖에, 충분치도 않은 음식을 건네며 어서 들어가라고 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아마 언제 또 다시 보겠지. David… 가장 위대했던 왕의 이름을 하고 구걸을 해야 하는, 이 아픈 아이를.


  아이를 만난 후로 날씨가 계속 추웠다. 춥다고 해봐야 한국 11월 기준에서 보면 선선해서 좋은 가을 날씨겠지만, 이곳 아이들에겐 두꺼운 겉옷이 필요한 날씨다. 얇은 이불밖에 갖고 있지 않아 나도 이불을 두 장씩 덮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추워서 이불 밖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로 내가 대신 추운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추위 때문에 그 아이를 매일 생각했다.


  그리고 11월 14일은 인도의 어린이날이었다. 아이들과 치킨을 먹고 선물을 나누면서, 웃고 사진 찍고 놀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인도의 모든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그 말간 눈으로 찬 거리에 서서 구걸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불의와 죽음의 느낌과 계속 마주친다. 역설적으로 정의와 생명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정의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계속 생각한다. 이 가치들은 너무 큰 것이어서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지켜질 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누구 한 사람에게 불의와 죽음의 책임을 물을 만한 일도 아니지만.


  다만 확실한 건- 서로에게 내미는 작은 관심, 작은 표현들이 촛불이 되어 어둠을 조금씩 몰아가는 것은 우리가 기대해 봄직한 일인 것 같다. 나는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손이 닿는 아주 작은 범위 내의 고사리 같은 그 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조차도 어려워서 쩔쩔 맨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내가 믿는 것은 소망과 사랑의 힘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어지는, 손 뻗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로에게 건네는 관심의 촛불.


  그래서 나도 이 글로 촛불을 전한다. 나는 인도에서 이런 소망을 보고, 이런 사랑을 하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다고. 이 보잘것없고 뛰어나지도 않고 심지어 풍성하지도 않은 마음을, 촛불로 치면 꺼져가는 촛불에 해당될 내 마음을 받아 함께 나누어 달라고. 심지를 돋우는 만큼 촛불이 아름답게 피어나 곳곳을 밝혀줄 거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