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내 마음 속에
내가 처음 인도에 갔던 그 계절,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작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대학생들이 NGO와 연결해 단기 봉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작년 그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지, 내가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또 팀을 꾸려 오기로 되었다고 했다. 작년에 왔다가 다시 오는 친구들도 많았다.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 아직까지는 학교 외에 경험한 세상이 넓지 않은 내게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건 의미가 꽤 깊은 말이다. 수업 듣고, 공부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산책하고, 동아리에서 기획하고 준비해서 일을 벌이고, 여행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매일의 일상을 같이 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해 깊이 친해진 친구들이기에, 마치 시댁에서 친정 식구들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런 걸까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기대했다.
내가 동생들이라 부르는, 같이 사는 집 아이들과 내가 한국에서 알던 친구들이 같이 뛰어 놀고, 점토로 만들기를 하고, 율동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함께 HIV/AIDS 가정도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그건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었다.
때로는 그냥 환자들의 근황만 나누기도 했고 또 어떤 집에서는 환자가 자기 지나온 삶을 담담하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나도 아직 온 지 3개월 차, 모든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닌지라 팀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내게도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렇게 다닐 때 보통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므로, 지치도록 몸을 움직일 일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감정적으로 많이 지치는 일이어서, 마치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걷는데 누군가 그 위에 물을 끼얹는 듯, 언제나처럼 참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환자들이 당한 일을 같이 분개하고, 통하지도 않는 언어로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찾아간 환자들에게 웃으며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렇게 팀원들이 최선을 다해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해 주어서 참 좋은 시간이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환자들을 초청해 한 번, 어린이들만 따로 초청해 또 한 번 행사를 했다. 대단한 행사는 아니고 그냥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도 먹고, 선물도 나누어주는 시간을 갖는 거였다. 사람들이 각자의 외딴방에 옹송그리고 연말연시를 보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작지만 이유 있는 행사였다.
작년에 팀으로 왔을 때 내가 그랬듯, 올해도 팀이 와서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공연을 해 주고 아이들과 놀아도 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언어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들어 보았을 생소한 지방 언어를 더듬더듬 한두 마디씩 배워 말을 걸며 따뜻하게 다가가는 팀원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참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팀원들이 앞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낯선 나라 사람들의 춤이라고 가만히 집중하고 보기 시작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 한 명은 낑낑거리며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가 제지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시끄러워져, 무어라 한 마디 하려고 주변을 살피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는 회백색의 탁한 눈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진행이 어려울 정도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가까이 가려고 일어선 순간, 팀원 중 한 명이 먼저 가서 가만히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손이었는데 놀랍게도 아이는 진정이 되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는 모두가 같이 있을 때 혼자만 같이 있지 못한 느낌이 힘들었던 게 아닐까. 내 친구는 그걸 알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손을 잡아 준 게 아닐까. 그 장면은 정말 눈물 나게 아름다워, 팀원들이 다 같이 공연을 하고 사람들이 박수 치고 좋아할 때 혼자 나무 사이에 서서 모기 뜯겨 가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팀원들이 같이 있는 그 시간들이 내게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으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듯, 비어 있는 곳에 하나씩 예쁘고 반짝이는 것들을 달아 주는 기분. 11월의 메마른 나뭇가지에 꽃이, 잎이, 열매가 차례로 아름답게 맺혀 울창한 숲을 이루는 것을 보는 기분.
환자들도 많이 기뻐했고 반가워했지만, 내게도 많이 격려가 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누군가 함께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큰 것이구나, 하고 나니 감정적으로 받은 격려 외에 일 차원에서도 격려가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친구가 되어야 할지 막막하게만 느껴지더라도,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손을 잡고 마주 보고 웃고 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이구나, 피와 살을 가진 사람과 사람이 부대낀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팀을 보내고, 다시 낯선 오늘을 맞았다.
팀이 갔는데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물론 감정적으로 흔들린 부분도 없잖아 있다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일이 있었다. 일상에 일어난 지진 같다는 느낌이다.
팀을 맞는 동안 팀 호스트를 맡은 나는 아이들과 살고 있는 집을 나와서, 팀이 머무는 숙소에서 지냈다. 그래도 팀이 아이들 만나러 우리 집을 방문하는 날마다 틈틈이 아이들 얼굴을 보고, 일주일이라도 비었다고 그새 내 방에 쌓인 흙먼지를 쓸고 닦고 하는 게 내겐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팀과 함께 대청소를 하기로 계획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 직전 오토릭샤가 파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팀을 데리고 나도 익숙하지 않은 버스로 다니느라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는데, 그 날도 파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파업이 3일 차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파업에서 빠지는 무리가 생겨, 웃돈을 얹어 주면 대로변이 아닌 길로 이리저리 돌아 목적지에 어떻게든 내려다 주는 기사들이 있었다. 자기들도 동료 눈치 보면서 하는 일이었다. 중간에 운 나쁘면 파업하는 기사들에게 붙들려 오토릭샤에서 쫓기듯 내려야 할 수도 있었다.
해서 무척 긴장하고, 평소보다 배는 비싼 가격에 흥정을 하고, 팀원들을 서너 명씩 오토릭샤에 태워 이윽고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푹 절여 놓은 배추처럼 지쳐 있었다.
대야, 고무장갑, 솔 따위를 잔뜩 챙기고 청소를 시작할 때, 현지인 간사가 좀 긴장된 표정으로 가까이 와서는 가급적 실내에서만 청소를 하라고 했다. 오토릭샤 파업 때문인지 경찰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무더기로 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오토릭샤 파업 때문이 아니라, 얼마 전 집 옆에 새로 생긴 교회와 집 앞에 음악을 왕왕 틀어 놓는 힌두 사원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다가 그들끼리 부딪친 것 같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때문에 경찰들이 보호 예방 차원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엔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청소를 위해 마당에 짐을 부리고 있는데 현지인 간사들이 그냥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우리가 뭐 마약을 나르거나 범죄를 저지르던 것도 아니니 딱히 위험한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조심하자는 뜻이었다.
외국인이라곤 좀처럼 없는 동네에 한국인들이 와글와글 많다는 건, 별로 긴장할 일이 아닌 것 같아도 경찰이 궁금히 여겨 질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도에는 NGO가 무척 많지만, 인도 자체가 딱히 NGO를 대놓고 반기는 나라도 아니다. 따라서 지극히 떳떳한 우리의 대답과 명분은 여기서는 그다지 매력적인 구실이 못 되었다.
“거 외국인이 수상한데 뭡니까?” 하고 경찰이 집에 시시때때로 찾아온다면, 대체 어떤 아이가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을까. 하물며 우리 아이들은 분쟁의 배경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경찰이 힘이 되어주기보다 또 하나의 공포가 되는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게 비록 가능성뿐이라 한들 피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이건 나중 일이고 그때는 정말 아무 설명 듣지 못하고 갑자기, 고무장갑만 달랑 벗어놓고 청소도구를 치우지도 못한 채 부리나케 나왔다. 그 후로 나는 아직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도 팀이 떠난 숙소에 남아 있다.
돌아갈 집도 없고, 같이 있던 팀도 없어지고... 갑자기 허공에 붕 떠버린 지금. 나는 내 감정 깊은 곳 속살이 여전히 너무 무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고, 든 자리 몰라도 난 자리 안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런 일 하나로 마음 전체가 묶일 만큼 어려워하는구나. 눈 닿는 곳마다 여럿이 함께 있던 곳인데 죄 비어 있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헛헛하기도 하고, 일상에 돌아가 아이들과 복닥거리면 금방 또 자연히 녹아들 텐데 그러지 못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가는 상황이나 내 마음이나, 의연히 넘길 수도 있을 텐데 왜 나는 이렇게 일상이 완전히 뒤집혀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 건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지금의 내 마음에 물을 준다는 생각으로, 의연하지 않은 모든 것들 위에 자장가처럼 토닥거리며 한 곡의 음악을 흘려 넣었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가 제목이었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그대 깊은 마음을 쉬게 해
늦겨울 지나면 새 봄이 오듯
저기 어딘가 여전히 반짝이지
그대 모습 이미 아름다워
마치 잊혀진 얘기 같아도
한 줌의 용기와 한 방울의 눈물
그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우리 작은 삶들에 비추고
깊은 밤 지나면 새 날이 오듯
여기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손짓하며
그대 모습 이미 아름다워
마치 잊혀진 얘기 같아도
한 줌의 용기와 한 방울의 눈물
그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우리 작은 삶들에 비추고
깊은 밤 지나면 새 날이 오듯
여기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손짓하지
사랑은… 사랑은…
한국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시끌시끌했던 때다. 멀리서 인터넷 기사로나마 한국 소식을 꼬박꼬박 접하고 있었는데, “하 수상한 시절”이라는 고전 시가 속의 단어가 일상어로 변하고, 대학생들은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대자보를 붙여 인사를 나누던 때였다.
그 인사에 때 맞춰 화답하지 못한 대신 슬쩍 노래에 담아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전했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우리 작은 삶들에 비추고, 깊은 밤 지나면 새 날이 오듯 여기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손짓한다고.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사랑이 여전히 사랑이어서, 뒤틀리고 어그러지는 지진 같은 일상에서 그거 하나로 버텼다고.
한국을 떠나 온 지 서너 달, 그동안은 적응을 위해 부단히 달리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달려온 길을 잠시 멈추고 내가 정말 이 곳에 서 있다는 것을 느끼는 시기인 것 같다. 정말 여기가 나의 일상 공간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기승전결의 '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함께함의 힘을 보고 그들을 보내면서 내가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는 건, 혼자처럼 느껴져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부득불 지금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가 아니라고, 누구도 혼자는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외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설일>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누구도 혼자는 아닌 그런 겨울, 그런 새해였다. 2014년, 또 한 번 인도에서 시작한 나의 새해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