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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15. 2015

잔혹한 여름의 시작

그리고 마음의 계절

  지금은 조금 지나갔으니 삶에 지진처럼 일어난 일을 조금 정리해 봐야겠다. 드라마 초입의 "지난 이야기" 같은 느낌으로다가.


  우리는 집 앞의 힌두 사원과 그 옆에 새로 생긴 교회의 긴장감 때문에 덩달아 너희는 뭐 하는 사람들이냐는 질문을 받고, 의아스러운 시선을 받고, 만약을 대비해 외국인들은 모두 집을 나와 다른 곳에서 지내야 했다.


  이웃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우리를 몰아내려고 서명을 받고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었고 이웃에게도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알력 싸움에서는 언제나 가장 만만한 이들이 희생양이 되는 법이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른 채로, 그래서 집에서 쫓겨나는 기분으로 짐도 싸지 못하고 부랴부랴 나왔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간이었다. 한국인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우리가 하던 모든 일까지 도맡아하게 된 인도인들에게도, 같이 지내던 스태프들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바빠진 상황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어냈을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모두 각자 빳빳하게 굳어 몇 주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행히도 일은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풀어져 갔다. 이제는 제법 일상의 평온함을 찾았다는 느낌이다. 살던 집에서 더 이상 밤잠을 잘 수는 없지만 출퇴근 하듯 다니며 아이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된 첫날, 큰아빠는 아이들과 우리를 모아 놓고 상황을 잘 설명해 주신 뒤 이야기해 주셨다.


  누나 형들은 위험할 때 자기들끼리 도망간 게 아니라, 여기 있으면 너희가 위험해질까봐 너희를 위해 여길 떠났던 거라고. 나도 몰랐는데 아이들이 우리가 자기들만 두고 가버렸다고 느꼈을까봐 내심 많이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그 말 한 마디에 마음 어딘가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사르륵 녹았다.


  지금 나는 다른 숙소에서 편안하게 즐겁게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모습이 마음 아팠던 우리 아이들도 지금은 안정적으로 평소처럼 학교 다니고 시험 보고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몇 명씩 묶어 우리 숙소로 초대해 평소보다 맛있는 간식도 해 주고, 종이접기도 하고, 영화도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일상을 찾아 갔다.


그 즈음 우리 아이가 만든 종이 비행기. Go speed!


  이제 정말 일상이다. 지진과 여진도 모두 지나가고 복구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진으로 흔들린 것들이 완벽하게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지금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옷이 뜯어지면 꿰매 주고, 공부도 보아 주고, 간식도 챙겨 주고,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로 바지런히 살고 있다. 요즘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집 한 귀퉁이에 새끼를 낳고 주변을 얼쩡거리며 예쁨을 받고 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이런 오후면 그야말로 그냥 한 장의 풍경화처럼 정적인, 정말 일상이다.


  3월, 한국은 시작의 계절이지만 여기는 요즘 초여름 문턱에 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기도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몇 시간씩 전기가 끊기는 걸 보면서 여름을 더 명확하게 느낀다. 오늘 낮 온도는 34도였는데, 땡볕 아래를 걸을 때는 불에 꾸덕꾸덕 구워지는 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다.


  이곳 여름은 5월에 정점을 찍는다. 이야기를 들었을 뿐 아직 겪어보지 않았지만 4-50도까지 올라가 숨이 턱턱 막히고 햇살이 공격처럼 내리쬔다는, 수도꼭지에서 펄펄 끓는 물이 나온다는 여름이 벌써 두렵다. 무엇보다도 체력이 걱정이다. 몸이 튼튼해야 뭐라도 하는데.


  그래도 5월에는 아이들이 긴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도 엉겁결에 한 달 간의 방학을 맞게 되어 그 시간을 보낼 계획을 짜고 있다. 북부에 가 볼까, 아예 네팔을 갈까, 이리저리 짜다가 엎어지고 짜다가 엎어지는 계획이지만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겁다.



  나, 라는 한 개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잘 지내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지금 이대로만 같다면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행복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다가도 한번씩 ‘나는 대체 어떻게 혼자 기쁠 수 있지?’ 하는 갈등을 안겨주는 생각들이 있다. 한국에서 내가 알고 있던 여름은 쉼, 들뜨는 여행, 즐겁게 방학을 누리는 시간이지만 여기 사람들, 특히 내가 가족으로 사랑하며  찾아다니는 HIV/AIDS 환자 가정에게는 어찌 보면 참 잔혹한 계절이다.


  우리 집에서도 전기와 함께 물이 밥 먹듯 끊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포스터 칼라 갖고 그렇게나 그리던 ‘물 부족’에 대해 온몸으로 배우면서 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참 좋은데… 현실적으로 빨래, 설거지, 아이들 목욕하는 물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니까 참 힘들다.


  하물며 수도나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살기도 다반사인 HIV/AIDS 환자들의 경우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면역력이 없고 체력이 바닥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잔혹한 햇볕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다. 보통 사람들금방 피로해지는 이런 계절에 먼 길 가서 일을 하고 돌아와야 하는, 혹은 그런 일조차도 잃어버린 사람들, 잘 먹어도 모자랄 판에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쌀과 렌틸 콩, 오일을 조금씩 사서 끌어안고 찾아 갈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한 듯 반겨 맞아주는 사람들. 이번 달 들어서만도 4명이나 결핵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 걱정이다. 확실히 이 여름은 잔혹한 계절이다. 그러나 과연 여름만 잔혹한지, 더 잔혹하고 더 공격적인 게 따로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런 요즘이다.



  한 차례 지진이 지나고 나면 건물의 내진구조가 잘 되어 있는지 아닌지, 도시 설계가 잘 되어있는지 볼 수 있는 것 같다. 결국은 그런 파악이 되지 않으면 ‘비 온 뒤에 땅 굳는다’는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마음도 그랬는데, 지진처럼 찾아온 수많은 일들이 멀어져 가고 일상이 회복되기 시작할 즈음, 약해진 마음의 구조물들이 삐걱거리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모든 게 다 싫었다. 뭐가 그렇게 다 싫었을까, 싶을 만큼 모든 게 다 싫었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작은 지점에서 시작된 생각이었는데, 들불처럼 금방 번져 언제부턴가 내가 여기 올 때 가져온 산뜻한 각오와 좋은 마음들까지 다 타 버리고 싫은 마음만 까만 재처럼 남아있었다. 컬처쇼크 중에 뭐 이런 단계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그런 식으로 분류될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좋게 보면 그냥 열심히 살고자 했을 뿐인 오토릭샤 기사들도, 길 다 아는 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격을 한껏 높여 부른다고 느껴져 지긋지긋했다. 생각해 보면 현지인보다 더 돈이 있어 보이는 나에게 더 오는 게 당연하고 오히려 안타까운 거지들의 구걸도, 마치 내가 무슨 표적이 된 기분이라서 싫게 느껴졌다.


  클리닉 약국에 새로 들어온 스태프가 나를 대하는 방식도... 처음 만난 서로가 잘 들어맞을  만무하건만 그냥 사사건건 맘에 들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현지인 스태프들과 일하면서 드러나는 사고 방식의 차이들도 죄다 싫게만 느껴졌다. 결국 이 모든 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건방졌던 거다. 지금 이 말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고 지웠다 썼다 몇 번을 반복하며 혼자 낯 뜨거워하고 있는지.


  그러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한 선교사님과 메일을 주고받다가 내 메일함에 들어온 한 줄의 문장이 내 마음에 명중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 잊지 말라’는 조언은, ‘이제 살다 보면 나쁜 것들도 눈에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돼라’는 그 조언은 지금의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꿰뚫었고, 그제야 내 마음을 표현할 문장을 찾았다.


  그리고 마치 장 볼 목록을 적듯 단조롭게, 일기에 주절주절 필요한 마음을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옳지 않은 것과 타협하지 않는 명확한 마음, 그러나 내 자신이 ‘옳다 그르다’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기엔 너무 미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임을 인정하는-나 자신을 아는- 마음, 때때로 명확하게 그르다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는 행위를 보더라도 그것은 ‘행위’에 대한 것일 뿐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한 것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할 것, 사람에 대해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것, 조급하게 굴지 말 것,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내 잣대대로 바꾸려고 들지 말 것.


  너무 어려운데? 가능한 건가? 가야 할 목적지를 파악한 건 기뻤지만 가는 길을 모르니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마음은 매일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봤고, 다른 것도 싫고 그런 나 자신도 싫은 날들을 어떻게  할지 모른 채로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수요일마다 가는 클리닉에서 내 마음의 구조물들은 기어코 우르르 폭삭, 무너졌다.



2014년 3월 어느 날


마음을 부드럽게 하자.

  인도와는 너무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숙이기 싫었다. 넓게 보면 문화 충격의 한 단계겠지. 내가 보기엔 ‘왜 굳이 저렇게 일을  하지?’라고 느껴지는 방법으로 일을 따라 가야만 하는 때라든지, 그냥 다루는 방식이 달라서일 수도 있지만 거칠다고 느껴질 때라든지. 그냥 다 싫어. 왜 저래.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사실 많이 무거웠다. 부끄럽지만 고작 그걸로, 그래- 그랬다. 클리닉 가는 길 내내 에이즈 환자들을 생각하면서, 길가에 거지를 보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참 이 모양 이 꼴이구나.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클리닉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끊어졌다. 마치 공격당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듯, 울음과 함께 무너지듯 닥터에게 기대는 한 여자의 등을 보는 순간.


  내 귀가 삼켜 소화할 수 있는 단어는 극히 적었고 그것만으로는 맥락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대뜸 물을 분위기도 아니어서, 그냥 우두망찰 바라만 봤다. 성벽처럼 무너진 등. 흘러내린 사리 자락을 훔쳐 올릴 겨를도 없이 격하게 울음을 토해내며 흔들리는 그 등.


  입에서 가락처럼 흘러나오는 하소연을 들어주며 말없이 여자를 안아주는 닥터의 얼굴은 안타까움에 벽돌처럼 굳어 있었고 이내 그 얼굴에도 눈물이 고였다.


무슨 일인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픔이 원색적인 모습 그대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약국 카운터의 C도, 닥터 L도, 약국 보조인 V와 나도, 약을 받으러 약국에 들어왔다가 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던 여자들도… 모두 그 적나라한 슬픔의 속살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다 다른, 그러나 다 같은 슬픔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라는 이름의 함께함이 부드러운 천처럼 둘러지는 것을 본 것만 같다, 는 기분이었다.


  마치 나는 그 공간에 속하지 않은 투명 인간이나 유령이나 뭐 그런 존재인 것처럼, 몸은 곁에 있었고 그 슬픔이 내 마음에도 와 울렸지만, 시선만은 어쩐지 혼자 한 걸음 물러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더 신기했던 건, 그 시간을 기점으로 그렇게 무겁던 내 교만한 마음이 내려놓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르게 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달라지기를 거리끼고 있던 내가, 이해하기보다는 욕이라도 한 바탕 쏟아 부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던 내가, 조금씩 들어올려져 나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무거워 뒤척이던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적응해야 한다. 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다가 아니다. 항상 현지 옷 입는다고 다가 아니다. 커리를 잘 먹는다고, 오토릭샤 아저씨에게 사기당하지 않는 흥정 능력을 습득했다고, 만원 버스도 제법 탄다고, 현지 말 몇 마디 한다고 적응을 한 게 아니다.


  적응해야지. 나를 바꿔서 달라져야지. 인도인 하인을 부리며 큰 집을 짓고 드레스 차림으로 티 파티를 하던, 인도를 식민지로 여기던 아주 오래 전의 누군가들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철저히 달라져야 한다. 달라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마음도.


  그러지 않고서야-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울겠다고 아무리 결심한들 도루묵이 되기 십상이다. 나중엔 무너진 결심을 다시 세우는 것에도 지치는 때가 올 지 모를 일이다. 너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본다면 그걸 다시 세우고 싶다는 마음조차 미약해지겠지. 그러려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자. 정의를 추구하되(정의가 필요한 대상은 내 마음이다!) 마음만은 부드럽게.



  이 결심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힘들었다. 남들의 시선에서 보면 그냥 ‘고집’이었겠지만 내게는 그게 마치 입의 혀처럼 눈의 속눈썹처럼 자연스럽게 제게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집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아, 그걸 인식하고 벗겨내는 것이 힘들었다.


  나중에야 이야기를 들었다. 클리닉에서 그렇게 섧게 울던 여자는 신혼 시절 남편을 잃고,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둘이 살다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그렇게 운 거였다.


  모든 모녀지간이 다 애틋하겠지만, 인도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자는 집이 꽤 많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결혼 전까지 어머니의 방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하는 여자아이들이 상당히 많을 정도다.


  에이즈 환자들의 경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아내를 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내가 만나는 환자들 중에도 친정 어머니와 자식들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 여자도 그 중 하나였다.


  병이 아니었다면 있었는지도 금방 잊힐 만큼 자신을 스쳐간 남편보다도- 평생 옆을 지켜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그 여자에게는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거다. 기댈 데 없고 친구 없는 삶, 비슷한 삶을 공유하는 여자들이 흘리는 눈물과 그 아픔을 돌보는 데 삶을 바친 사람들 눈에 고이던 눈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진득한 농도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일일이 사연을 다 알 수 없으나 기구한 사연 하나씩은 품고 사는 여자들이 그림자처럼 왔다 가고, 왔다 가는 곳이 여기다. 저번처럼 격한 울음은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지만,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아 한숨처럼 말을 쏟아놓고 가는 사람도 있고, 세상 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와서 내 손을 잡고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피붙이라도 만난 것처럼 애틋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왔다 가고, 왔다 간다. 그 슬픔의 농도는 사리 자락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으로 얽혀 은근하게 전해 져 오곤 한다.


  그리고 그 어지럽게 얽힌 슬픔이 아른거리는 그 뒤로, 불의가 섬뜩하게 눈을 빛내는 짐승처럼 서 있다. 내 마음에도 같은 불을 밝힌 짐승 한 마리가 서 있다는 걸 깨달으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거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왔는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하는 내 자신이. 근데 또 그냥 이게 작고 미약한 내 자신이구나, 싶다. 바람을 넣어 부풀리지 않은 그냥 나는 딱 이만한 그릇이구나, 하는 생각.


  결심은 시시때때로 흔들리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짐승이 망령처럼 떠나버린 후 마음은 훨씬 즐겁고 가볍다. 사람들을 보는 시선도, 이제는 익숙해진 버스 승차나 다른 사람들과의 여러 관계에서도 조금은 여유가 생긴 자신을 본다. 얼마쯤 더 간다고 해도 오십 보 백 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오십 보 백 보'를 평생 반복하다 보면 나는 시작점에서 점점 멀어지겠지.


  대단한 영웅이 되길 꿈꾸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그렇게 사는 평범한 한 사람이고 싶다. 내가 어떤 모습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의의 짐승이 사람을 얼마나 짓밟는지를 보고 살기 때문에 도저히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그 뿐이다. 그리고 안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걸 잃는 순간 사람은 언제 괴물이 되어 미쳐 날뛸지 모른다는 걸.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부부지만. 이미 이전에 한 번 일기의 한 토막에 등장한 적 있는, 한 환자 부부를 소개하려 한다. 그 후로도 두어 번 이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첫인상과 너무 다른 이 분을 알아가게 되면서 또 그분의 삶에 불의가 얼마나 횡행했는지, 그 때문에 한 가정이 얼마나 송두리째 뒤집히고 잔인하게 짓밟혔는지를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장르를 정하자면 휴먼 다큐멘터리겠지만, 차라리 막장 드라마였으면 싶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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