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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12. 2015

한계는 인정할 때 한 뼘 멀어진다

시: 즐거운 편지 (황동규)


고등학교 때 처으로 깊이 음미하며 이 시를 읽었다. 수학 점수가 영 나오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기숙 학원에서였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고, 유독 춥고 외롭게 느껴지던 때였다. 학원에서는 국영수 위주로 수업을 했고, 내가 전력으로 매달린 건 모자란 수학 시간뿐이었으나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국어 시간과 영어 시간은 주로 앉아서 그리워하는 시간이었다. 등 뒤에 두고 온, 모든 안정감이 속해 있는 내 세계를.


국어 선생님은 엄마 나이 또래의, 서글서글한 여선생님이었다. 가르치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냥 선생님이 강단에 서서 말을 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편안한 인상이었다. 입시 문제에는 늘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시니컬하게 현실을 이야기하던 다른 학원 선생님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였다. 학교에서, 그것도 점심 방금 먹고 막 시작한 오후 수업에서 아이들이 졸고 있어도 똑같은 표정일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선생님과 한 마디 말도 해 보는 일 없이 선생님에게서 오는 편안함을 좋아하고 의지했는데, 그걸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온통 낯설고 두려웠던 것 같다. 두려움을 멀리하기 위해 본문으로 나온 <중국인 거리>에서 아이들이 입안에서 톡톡 터지게 씹는 밀씨가 내 입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글씨 하나하나를 터지게 씹었고, 외로움을 해갈하기 위해 본문으로 나온 시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 시는 그때 교재에서 보고 그 긴긴 겨울날 계속 입내 내듯 읽었던 시다.



사소함의 미학, 평범함의 비범함. 우리에게 위안이란, 내 삶에 안정감이란 대개 내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 사이에 있다. 항상 가방에 들어 있던 일기장, 입고 있으면 파묻혀 안긴 기분이 들던 두꺼운 니트, 옆에 가만히 앉아 위로하듯 잠들던 고양이의 온기, 어느 4월 아주 잠깐 사이 봄이 걷히는 것을 느낀 순간과 그때 같이 있던 사람, 매일 입는 잠옷, 뭐 그런. 하다 못해 어린아이의 곰인형 하나라도. 아주 사소하지만 시간을 덧입어 특별해져 버리면 더없이 강하다.


그러나 역으로 내가 그 사소함을 매일 제공해야 하는 위치라면 어떨까. 내가 어떻든 상대방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를 때 손 닿을 거리에서 늘 같은 억양으로 응, 하고- 너무 다정하지도 너무 매정하지도 않아 사소하게 느껴지는 톤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면. 괴롭지만 사실 그런 모습은 이 세상에 만연하다. 짝사랑이나 내리사랑이 그런 모습으로 도처에 있으니.


이 시를 읽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사랑으로 읽으려나 궁금하다. 오랜 짝사랑 안에서 이 시를 읽은 탓일까, 내 눈에 이 시는 짝사랑하는 이의 진솔한 울림으로 들어왔다. 으레 짝사랑의 고백이라 한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절절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수많은 노랫말이 그토록 애절하듯이. 상대가 세상의 유일한 소실점인 것처럼, 상대가 없는 나의 내일에는 빛이 없는 것처럼 노래하는 발라드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만 봐도 짝사랑의 고백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뿌리가 깊다. 기실 편견만은 아니다. 짝사랑이 어려운 건 상대방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닿지 않는 손 끝을 계속 뻗고 있어야 하는 손 저림과 민망함, 괴로움과 서러움 들이 어찌 없으랴만은.



그러나 사소함. 이 시가 짝사랑으로 쓰였는지, 짝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자의 마음은 넓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사랑이 그칠 것임을 안다는 고백은 무력해 보이지만 사실  마음을 좀 더 편안하고도 신뢰하면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소함으로 존재하다가 괴로움에 헤매는 당신을 그 사소함으로 불러 보겠다는 화자의 든든한 사랑은,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언젠가 끝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편안하게 인정함으로 더욱 강인하다. 꼿꼿하게, 사소함으로 존재하려는 이 사랑을 끝끝내 지키고자 한다.



시인이 고등학교 때 연상의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랑은 나이와 비례하게 성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사랑도 배워야 하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에서 젊은이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릴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는 게 그만 지나쳐서 꼰대 같은 마음이 내 안에 생겼던가 보다.


고등학생의 고백이라고 하여 더욱 놀라웠던 저 사랑. 저 사랑은-눈이 오고 날씨가 추워져도, 다시 꽃이 피어 마음이 살랑거려도, 낙엽이 떨어지면서 쓸쓸한 마음이 욱 하고 올라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사소함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그 사랑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며 어떻게든 결론만을 보고 달려가는 마음이 아니다. 제 사랑의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상대의 어떤 선택과 감정까지도 소중하게 같이 끌어안는 마음이다. 사실 내가 하고자 했던 건 그런 사랑이었는데.


이 시를 읽고 전율을 느꼈던 고등학교 때의 외로운 나도, 지금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이 시를 읽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로 끈끈한 가족이고 싶고, 훗날 연애를 하더라도 그런 연인이 되고 싶고, 친구들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으며, 엄마가 내게 그래 줬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 내 아이에게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를 읽을 때면 어디선가 가상의 눈발이 흩날리고, 나는 12월의 한국뿐 아니라 7월의 인도에서도 이유 없는 한기를 느끼곤 했으니, 아마 계절이 어떻든 나는 나의 씨앗을 심는 그런 마음은 아직 한참 더 지나야 내 안에 피어날 것 같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감정 이입을 해도 '그대'에게 감정 이입을 도저히 할 수 없고 늘 '나'에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나'가 1인칭이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그 이유 또한 가상의 한기를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는지. 뇌리 어딘가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영혼의 한 조각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거였다.



화자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도, 호기롭게 외치지도 않았다. 자신의 사랑에 감히 영원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의 빛을 고스란히 담은 시간, 현재에 담아내고자 애쓰는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였다. 현재는 오늘이 아니다. 오늘의 현재는 오늘이지만, 내일의 현재는 내일이니까. 이 시가 쓰인  몇십 년 전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거다. 그 현재의 모습이 반드시 탄탄대로로 이어질 거라고 자신하지도 않았다. 오만하지 않은, 겸손한 고백. 외려 그 모습에 경외감이 든다. 사소함의 고백은 오히려 그 사랑의 깊이를 더했다. 한계는, 인정할 때 한 뼘 멀어지는 법이다. 부디 나의 오늘도, 나의 현재도 그런 모습이었으면 한다. 내 삶을 둘러싼 모든 것에 그런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기표의 기의는 한 뼘 깊어질 것이고 그건 내 삶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한 뼘 키우는 일이 되겠지.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나의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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