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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17. 2015

유약하게 파들거리는 세계들의 조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와이 슌지 감독)

※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추천합니다. :D



나 열여섯 살, 러브레터를 보았다. 감동적이다. 이런 비슷한 게 있으면 더 보고 싶다. 감독을 찾아본다. 이와이 슌지. 그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본다. 주르륵 나오는 영화 이름을 훑어본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가장 소녀스럽고, 가벼운 무게로 예쁜 이름이다. 포스터를 본다. 아직 모가 푸른 논에 서서 음악을 듣고 있는 교복 차림의 소년. 싱그러워 보인다. 영화를 구해서 본다. 충격에 빠진다.


비슷한 루트를 탄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러브레터를 보고, 어쩌다 4월 이야기까지 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뭣도 모르고 보았다가 충격받은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테니까. 게다가 열여섯의 나는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좀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게, 다른 말로 하면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나만 보고 살았던 아이였다. 러브레터를 보고 감격하는 감성까지는 있었지만, 릴리 슈슈를 보고는 '일본 10대들은 저래?'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알아보려고 뭔가 조사하다가 "유작을 정한다면 이것으로 하고 싶다"는 감독의 만족스러운 말을 들으며, 이게 망작이 아니라 그에게 자랑스러운 작품임을 볼 수 있었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등으로 '첫사랑 감상'의 천재처럼 일컬어지던 감독이... 우리의 10대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냐고 던지는 일갈 같은 느낌이었다.


충격, 그 이외에는 딱히 감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는데 왜일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결국 한국에서 이와이 슌지 기획전으로 재개봉하기 무섭게 내가 제일 먼저 예매한 것도 이 작품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고 싶었다. 여전히 이 작품은 내게 그저 충격과 구역질 나는 장면들 일지.


메가박스 아트나인 '이와이 슌지 기획전', 당신이 기억하는 첫 설렘.

혼자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차분하게 걸으며, 나는 두 십대를 보았다. 하나는 그저 순진무구했던 나의 십대, 다른 하나는 영화 속 아이들의 십대. 내게 10년 전 충격을 안겨주었던 후자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꼈다면 이상할는지.


여기까지 쓰는, 몇 문단 되지도 않는 글에 '충격'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썼다. 그럼 대체 뭐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는지 내용부터 좀 되짚어 보자.



영화는 시작부터 두 가지 배경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는 활자와 타이핑 소리로 대변되는 온라인 세계, 그리고 하나는 10대들이 현존하는 오프라인 세계. 주로 주인공이 되는 아이는, (참 많은 사람들을 저 스틸컷 하나로 본의 아니게 낚은) 하스미. 이 친구는 사실 온라인 세계에서도 '릴리 슈슈' 팬클럽 <릴리 피리아>의 회장 격인 '피리아'다. 오프라인의 하스미는 말이 많지 않지만, 온라인에서의 피리아는 릴리 슈슈에 조예가 깊은 듯 릴리 슈슈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쓰고 있는 데다가 어휘력도 풍성하다. 그래서 피리아가 쓸 때는 에테르나 릴리의 밴드 전력 등을 소상히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잡담도 한다. 닉네임을 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닉네임이 '쿠마(곰이라는 뜻)'인 사람은 릴리 라이브 때 곰인형을 안고 가겠다고 하고, M13는 한자와 히라가나의 조합이 아닌 가타가나만 사용해서 타이핑을 하는데 과장된 말투를 사용한다. 그러던 중 아오네코(靑猫, '푸른 고양이')가 이제야 이 사이트를 알았다며 등장하고 자기 '썰'을 풀기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까만 화면에 하얀 활자로 이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나는 스토리라인을 소개하기 위해서 여기서만 적고 가기로 한다.


이번에 큰 스크린으로 보면서 느낀 특이한 점이 있다면, 타이핑 소리의 원근이 다르다는 것. 피리아가 타자를 칠 때는 코앞에서 타자를 치는 듯 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아오네코가 타자를 칠 때는 얇은 벽 하나 정도 뒤에서 치는 듯 가깝지만 조금 장애물이 있는 거리에서 들리고, 다른 사람들이 타자를 치는 소리의 크기는 그것보다 조금씩 멀리서 더 흐릿하게 들린다.



릴리 슈슈는 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봐도 내가 제대로 본 건지, 고화질로 본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영화 자체가 중간중간 날것 느낌이 드는 카메라 연출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나는 안경 끼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렌즈를 빼놓고 갔는데, 가서 보니 안경을 두고 왔더라... 하.) 적외선 카메라에서 흐릿하게 잡히는 아이들의 밤 장면들이라든지, 오키나와에서는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에 찍힌 영상 그대로를 보여주는 설정이라든지. 하스미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조금은 불안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음반 매장에서 CD를 훔쳐다 파는 것도 그렇고, 길 가다 마주친 지인이 주신 용돈을 친구가 그대로 제 주머니에 넣는데 한 마디 말도 없는 거 하며. 시작부터 어디서 빵 셔틀 냄새가 나요... 그러나 잠시 후 호시노라고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받는데, 호시노는 '응'이 아니라 '네'라고 대답하라고 하고서는 불러내서 괴롭히기까지 한다. 뭐야? 영화 시작하자마자 뭐야? 등장인물 소개도 친절하게 받지 못한 관객은 혼란스럽다.



영화는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린다. 사실 호시노와 하스미는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였다. 입학생 선서를 한 호시노는 또래보다 키가 한 뼘 크고 얼굴이 잘 생겼으며 똑똑한 아이. 게다가 검도부에 들어가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기소개를 하는 신입생에게 '안 들린다'고 더 큰 소리를 지르길 유도하는 선배 앞에서 유유자적하게 한 발짝 앞으로 돌아 나가서 소리를 키우지 않고 묵묵히 제 소개를 하는 배짱도 가진 녀석이다.


검도부 연습에 와서 선배 이름을 목놓아 외치며 연습이 방해될 정도로 꺅꺅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한 마디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입생 대표라고 우쭐대지 말라며 다들 널  재수없어한다는 여자아이들의 말을 듣고서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선배가 사주는 라멘을 먹으며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하스미가 호시노네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기까지 했다. 바르고 훌륭한, 저대로 자란다면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은 중학생 같아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다들 검도부인 듯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친해지기 시작할 즈음 전철역에서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녀석들이 호시노를 알아보고 조롱하고 물건을 던져 호시노 머리에 맞추고 한다. 호시노가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은 그랬구나, 어쩐지 그 집 갔을 때 엄마가 엄청 잘해주시더라, 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호시노와의 관계가 달라지진 않는다. 다들 그냥저냥 실제 중학교에 있을 법한 보통 녀석들이다. (어머니가 이나모리 이즈미 닮은 엄청난 미인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호시노 어머니 역할을 한 배우가 이나모리 이즈미다.)


그렇게 적당히 거칠고 적당히 투박하며 적당히 착한 14살 소년들은 여름 방학을 맞는다. 그러나 가진 돈 갖고는 갈 곳도 없고, 고민하던 아이들은 강도 짓이라도 해보겠다고 주차장을 기웃거린다. 그런데 먼저 온 녀석들이 있다. 중한 일에 쓸 돈인 듯 큰 돈뭉치를 갖고 있던 남자에게서 돈을 빼앗아 낄낄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데 호시노가 잽싸게 뛰어가 그 돈을 낚아챈다. 결과는 본인들 말마따나 운동한 몸들의 승리. 아이들은 오키나와로 휴가를 떠난다. 현지 가이드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오키나와 현지 말을 쓰는 늙수그레한 아저씨와, 꽤 어여쁜 누나들. 그리고 분명 일행이 아님에도 차를 얻어 타고, 간식과 밥을  얻어먹으며 시시때때로 나타나 치고 빠지는 탐험가 형. 아이들은 '분명히 밥 먹으러 온 거다'라고 수군대지만 별 말없이 그에게 곁을 내준다. 그는 오키나와에 꽤 여러 번 왔고, 이번에는 무슨 새를 꼭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옆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 목을 조르듯 죽이고 양분을 빼앗아 먹는 식물이 있다고. 빨리 감기로 보면 굉장히 끔찍한 광경일 거라고. 이 섬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생과 사가 나란히 있고, 어쩌면 이 곳의 생물들에겐 지옥일지도 모른다고. 생과 사가 나란히 있는 곳... 이제 중학생, 웬만해선 죽음을 실감할 나이가 아님에도 아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꽤나 진지하게 경청한다.


생과 사가 나란히 있다는 그 섬에서 호시노는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한 번은 별 생각 없이 랜턴을  밤바다에 비췄다가 뾰족한 물고기가 튀어올라 공격하는 바람에, 한 번은 물에 빠져서. 물에 빠진 호시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호시노가 제때 구급 조치를 받을 수 있게 해 준 건 그 탐험가 형이었지만, 정작 그는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 치여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며 헬기에 실려간다. 그리고 볼살이 통통해 앳되어 보이는 여자는 말한다. 저 남자가 뛰어든 거니까 남편은 잘못이 없어요, 그렇죠? 하고. 생과 사가 나란히 있는 곳, 평화로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곳은 식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때 호시노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적당히 껄렁해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그래도 남의 이야기를 제법 경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염이 텁수룩한 현지 가이드가 그곳 설화에서는 사람 목숨이 7개가 있다고 하는데 호시노는 2개를 잃었으니 이제 5개가 남은 거라고 하면서, 뭔가 이곳의 신이 노할 만한 나쁜 물건을 섬에 들여온 게 아니냐고 묻는다. 코웃음 치고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도 있을 이야기지만, 호시노는 친구가 들고 있던, 훔친 돈을 홱 낚아채서는 허공에 날려 버린다. 이때만 해도 호시노는 아직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아이였다.


모든 게 변한 건 개학 후였다.



개학 후 하스미에겐 '응'이 아닌 '네'로 대답하라는 전화와 함께 린치가 가해졌고, 하스미뿐 아니라 반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이누부시라는 녀석은 호시노에게 문자 그대로 짓밟혔다. 오키나와에서만 해도 호시노는 그래도 호시노였는데, 그 이후의 호시노는 하스미에게 너무나 낯선 모습이다. 그리고 개학 후 우리는 두 여자아이를 보게 된다. 아오이 유우가 연기하는 츠다, 그리고 이토 아유미가 연기하는 쿠노. 츠다는 호시노에게 누드 사진을 찍혔고 그걸 빌미로 호시노가 계속 원조 교제를 시키고 있었다. 하스미를 비롯한 몇몇에겐 츠다를 감시하는 일까지 맡긴 걸로 봐서 꽤나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느낌이고 그래서 더 악랄하다. 이건 네 몫이라고 호시노가 그랬어, 하며 떼어 준 지폐 몇 장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받아 들고, 등 뒤에는 따라오는 하스미를 둔 채 묵묵히 걷던 츠다는 '너 호시노에게 삥 뜯긴다며? 이거 줄게.' 하고 돈을 내민다. 하스미가 말없이 돈을 받자 그 돈을 진흙 발에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냇가에 뛰어들고, 제대로 세게 때리지도 못하는 여린 몸이면서 제 나름대로는 있는 힘껏 하스미를 발로 차고 가방으로 때린다. 그 장면은 꽤나 마음 아팠다. 자기에게 쏟아진 호시노의 분노와 폭력을 어쩌지 못하는 츠다의 발버둥이어서. 이윽고 츠다는 집에 도착해 마당에서 냇가의 흙탕물을 대강 씻어낸다. 그런데 마당이 익숙하다. 호시노가, 살던 집이다. 그 집 앞에서, 츠다는 하스미에게 전철에서 듣던 릴리 슈슈 CD를 (뺏다시피) 빌린다.


그리고 쿠노. 피아노를 잘 치는 쿠노. 시작부터 계속해서 드뷔시를 치고 있는 쿠노. 사실 초등학교 때 호시노와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이 있고, 릴리 슈슈의 앨범을 호시노에게 선물한 적도 있던, 호시노가 좋아했고 하스미가 좋아하는 말 없는 소녀. 호시노의 괴롭힘 외에 교실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 츠다와 달리 쿠노는 교실에서 다른 여자아이들의 밉상이 되고 있다. 불량의 아이콘으로 설정된 듯한 칸자키를 필두로 해서 쿠노를 괴롭힌다. 합창 대회에서 쿠노가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자 그 아이들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반장인 사사키는 정의롭고 공정한 아이다.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 책임감도 있다. 여자아이들을 따라가서 고개 숙이며 부탁하기까지 할 만큼. 그러나 정작 담임교사는 별 의지가 없다. 현실을 보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며, 심지어 학생인 사사키가 '지금 상황이 이러이러한 상황이잖아요' 하고 설명해 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듣는다 한들 교사가 취하는 행동은 없다. 초반에 하스미가 음반 매장에서 릴리 슈슈의 CD를 훔쳤을 때 가서 조치를 취하는 등 나름대로 뭔가 한다고 하긴 하는데, 젓가락질로 치자면 깨작거리는 느낌이다. 아이들의 정서나 행동 깊숙한 곳까지는 전혀 발을 뻗지 못한다. 교사의 이름은 '오사나이'인데 어리고 미숙하다는 단어와 발음이 같다.


아무튼 그런 교사에 비해 쿠노는 똑똑하다. 사사키처럼 정공법을 택하지도 않는다. 그저 빠르게 악보를 아카펠라 버전으로 편곡해 피아노가 낄 틈을 없애 버린다. 미움받지 않는 법을 알 만큼 똑똑하지만, 억지로 합창 대회에 참가하고 나서야 그 편곡을 쿠노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칸자키는 또 쿠노가 밉다. 그리고 호시노와 함께, 나쁜 짓을 또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쿠노를 좋아하는 하스미는, 하필이면 쿠노를 공장으로 유인하고 망을 보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스미의 안내로 공장에 들어가지만 사태를 금방 파악한 쿠노는 여기저기 숨고, 도망치고, 반항한다. 호시노의 사주로 남자아이들이 쿠노를 윤간하는 이 장면은, 남자아이들이 극 중 촬영을 위해 들고 들어간  비디오카메라 느낌 그대로, 오키나와 장면처럼 날것 느낌으로 들어간다. 계속해서 흔들리고, 쿠노가 카메라를 부수려고 하고 (역시 똑똑하다)... 그래서 카메라에는 상이 제대로 잡힌 것도 별로 없이 깃털이 날리거나 기계가 돌거나 하는 장면 위주로 들어있지만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위압감이 더 상당하다. 10년 전의 내겐 너무나 무서웠던 장면이었다.


게다가 하스미가 서 있는 공장 바깥은, 오후 햇살이 어찌나 촘촘하게 스미는지 갈대 하나 풀잎 하나마저도 너무나 빛난다. 잔잔한 아라베스크가 깔려 있고, 빛이 곱게 스며들어 있는 연출이어서 더 괴롭다. 여기 구경 나온 칸자키가 쐐기를 박는다. 사실 이 공장, 지금은 쿠노네 거지만 그 전엔 호시노네 거였다고 하스미에게 설명을 해주고는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끔찍하다. 반면 하스미는 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좋아하는 사람을 그런 폭력의 굴레에 넣고 자신도 거기 깔려 있는 현실. 잔잔한 아라베스크와 햇빛 아래서. 그 장면을 보는 관객은 몸이 부르르 떨리지만, 호시노는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다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날. 쿠노는 머리를 삭발하고 학교에 온다. 다른 아이들은 의미를 모르고 웅성거리지만 쿠노의 표정은 큰 미동이 없다. 쿠노가 강한 아이라는 건 그전의 츠다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지만 이 모습은 단연 압권이었다. 다만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지라 그 속 사정을 정확히 파악한 츠다만이 쿠노를 보고 남 모르게 운다. 사실 츠다도 생각은 해 보았다. 뚱뚱해지면 이 일을 하지 않게 될까, 이리저리 생각하며 하스미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걸 쿠노는 단박에 해 버렸다.



사실 쿠노가 삭발한 머리로 나타나기 전, 츠다는 사사키에게 고백을 받지만 거절했다. 이미 평범한 14살로서는 살 수 없다는 츠다의 말에 하스미는 '사사키라면 널 위해 호시노와 싸워 줄 텐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런 하스미에게 츠다는 네가 지켜주면 되지, 그러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넌지시 말한다. 하스미가 쿠노를 좋아하는 것도 알면서 건넨 고백이었다. 호시노에게 그리고 다음날 쿠노의 삭발한 모습을 보고 얼마 후, 츠다는 연날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사사키가 좀 보자는 말을 하스미에게 듣고서도 '큰일 났어, 요즘 남자는 다 손님으로만 보여'라고 말하던 츠다인데, 연날리기를 하는 사람은 순 남자뿐이었지만 그 앞의 츠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처럼 밝고 명랑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까르르 웃는 츠다의 밝은 얼굴이 보인 것도 영화에서 처음이다. 연을 타고 싶어요, 하늘 날고 싶어.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츠다는 연을 날리던 자리 전신 탑 아래 시체로 누워 있다. 늘 들고 다니던 핸드폰, 받기 싫었을 연락을 받아야 했던, 유난히 참 장식이 많이 달려 있던 핸드폰은 전선에 걸려 있다. 어둑한 땅 위에 비해, 빛을 받은 전선 위에 걸린 핸드폰 장식들은 주렁주렁 많고 또 알록달록하다. 대조적이다. 그 장식처럼 곱고 밝아야 했을 츠다의 삶은 너무 빨리 꺼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릴리 슈슈의 라이브가 결정된다. 피리아와 아오네코는 오프라인의 서로를 전혀 모른 채 만나기로 하고, 표식으로 아오네코가 파란 사과를 들고 있기로 한다. 피리아, 즉 하스미가 가서 아오네코를 찾기도 전에, 우연히 마주친 호시노가 콜라를 사 오라고 하스미를 보내고는 하스미의 티켓을 찢어 버린다. 하스미를 보내면서 사과도 건넨다. 이거 들고 있다가 말 거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주라고. 피리아는 오프라인의 아오네코를 찾았다. 그러나 아오네코는 오프라인의 피리아를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


라이브가 진행되는 내내 하스미는 밖에서 전광판을 보며 서 있다. 여기서도 릴리 음악 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웠다가,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가 스피커로 들리는 것처럼 잡음 섞였다가, 오락가락한다. 라이브가 마치고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새에서 호시노를 다시 만난 하스미는, 그 인파 가운데 소리를 지른다. 릴리가 저기 있다고! 그리고 그 말에 물 밀듯 들어가는 사람들에 섞여 호시노의 뒤로  따라붙는다. 호시노는 쓰러지고, 하스미는  그곳을 벗어난다. 나중에 하스미의 덜덜 떨리는 손에는 피 묻은 칼이 박힌 파란 사과가 들려 있다.



츠다가 없고 호시노가 없는 세계. 칸자키나 다른 녀석들에게 호시노는 이쯤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인한 쿠노나 사사키의 세계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숙하게 손을 내미는 오사나이도 교사 면담에서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할 뿐 변하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 있니? 다정한 말투지만 하스미는 없다는 말 외에 대답할 말이 없다.


가는 길에 쿠노에게 이제 가도 된다고 전해주렴, 하는 선생님의 말에 쭈뼛쭈뼛 들어가는 하스미.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하스미가 단박에 괜찮아질 수 있을 리 없다. 쿠노에겐 더더욱 그럴 거다. 마음의 빚이 크니까.


이 장면은 다소 자살을 염두에 두고 연출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상반신만 보이다가, 머리와 발을 제외한 전신이 보이고, 이내 하스미가 고개를 내리면서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보이니까. 자기 자신과도 화해가 영 되지 않은 하스미다. 그도 그럴 것이 하스미는 호시노를 죽였다. 그게 갈등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스미 내면에 있는 모진 갈등들은 끝나지 않았다. 도둑질 이야기를 듣고 그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아이를 때리던 그 어머니, 또 어머니의 재혼으로 엮인 새 가족. 그들 중 누구에게도, 아니 세상 누구에게도 하스미는 말할 수 없다. 영화는 그렇게, 하스미가 염색을 하면서- 끝난다.



몇 년 전 신촌에서 여대생이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인터넷 카페로 알게 된 10대들이었고, 초반에는 인터넷 카페의 내용을 문제 삼는 기사가 주였으나 이내 '학대의 상처 곪아 터져' 같은 기사 제목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유심히 보았는데, 이야기를 나눈 후 프로파일러들에게 아이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쓰여 있었다. 어떻든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 건, 프로파일러들 뿐이었다고. 그 이야기가 너무 마음 아파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아이들이지만 그게 아이들의 한 면이었던 동시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다른 일면은 안쓰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두 가지 이상의 모습이 겹겹이 칠해진 유화처럼 공존할 수 있다. 우린 유동적이며, 일반화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감정은 더 그렇다. 착하다 나쁘다 같은 단어들도 많은 경우 그렇다.


릴리 슈슈를 다시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외부에서 보면 '중2병', '요즘 애들 문제야' 한 마디로 일축되어 버리기 얼마나 쉬운가. 사회 면 기사 속 '요즘 애들'은 얼마나 기상천외한 사고를 치는가. 이 영화 속 아이들은 얼마나 토악질 나고 멀미 나는, 보기 힘든 일들을 자행하는가. 단어로 뭉뚱그리는 순간 고스란히 범죄의 목록이 되는 살인, 강간, 협박, 집단 폭행, 학교 폭력, 절도 등등.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모든 걸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외부자의 시선에서는 딱딱한 단어 몇 개에 갇힌 범죄지만,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외로움, 슬픔, 고독, 막막함 등의 감정과 그 앞에 '첫'이라는 관형사가 붙어 소용돌이친 혼합색이고 사건은 그 폭발이다. 이와이 슌지는 여전히 십대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 그 말에 공감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는 십대들의 내부자였다.


앞의 몇 문단 쓰면서 다섯 번이나 썼던 '충격'이란 단어도 실은 외부자의 시선에서 나올 수 있는 단어다. 사실 이 영화는 러브레터와 정 반대 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한 감독의 한 핏줄 영화다. 그 시절을 잠자리처럼, 부서지지 않고 간직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사건에서도 햇빛만큼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담아낸 이 영화는, 사실적이다. 빛은 늘 비슷하게 그 자리에,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던 그 날 낮에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이 들려왔던 그 날의 낮에도 고요히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충격을 전달하려 했다기보다 담담한 필치이고자 했다.


모든 처음은 서툴다. 게다가 가계 부도, 가정 파탄,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이라면. 도장 찍듯 말로 꾹 담고 넘어가긴 너무나 쉬우나, 당사자에게는 세계가 뒤흔들리는 괴로움이다. 그 소용돌이의 혼합색을 하나씩 뜯어내 그 감정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당사자를 볼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 당사자가 반응하는 큼직한 방향성과, 여러 가지가 섞인 탁한 색만 보일 뿐.


그 방향성. 호시노는 자기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외부에 힘의 압박으로 쏟아내었다. 하스미는 엔딩 전까지 줄곧 그에 대해 굴복하고 있었다. 츠다와 쿠노는 그 압박 앞에 나름대로의 강인함으로 맞서고자 했다. 둘의 차이는 내가 보기엔 그저 한 발자국이다. 처음 발휘하는 용기란 대개... 대단히 마초적이고 거칠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끝까지 몰려간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끝까지 치고 올라가, 숨 턱 막힐 때쯤 싹을 틔운, 아주 연한 새순 하나만큼의 크기. 그만큼의 생명력. 그 유무가 생사의 갈림길이 되었다.


부디 이 이야기가, 이 엔딩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갭'으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한다. 온라인이라고 해서 진실된 자신일까. 오프라인이라고 해서 눌려 있던 모든 게 온라인이라고 다 해소되고, 그래서 온라인이라고 다 자신 그대로일까. 아닐 것 같다. 만약 온라인이라고 온전히 자신이었다면 호시노는 사과를 하스미에게 넘기지 않았을 거다. 제 손에 쥐고 피리아를 기다렸겠지. 하지만 진짜는 자기 내부에만 있다. 그 내부의 일부는 온라인으로, 또 일부는 오프라인으로 내보내며 자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 하스미는 이제부터 자기 내부를 뜯어보아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낀 이유는 아이들 각각이 겪은 일 때문만이 아니다. 호시노의 집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쿠노가 집단으로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츠다가 원조 교제를 강요당하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하스미가 친했던 친구에게 린치를 당했기 때문에 연민이 느껴지는 게 아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하나하나의 세계가 조각났다는 게, 사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질 수 있었을 일들이라는 게 마음이 아픈 거다. 마음 기댈 데 없는 14살들. 부모도 교사도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기 길을 오롯이 찾아 나가기 힘들었던 14살들. '14살이란 그렇게 순진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나이지 뭐'라고만 치부하기엔.. 14살 아니라 24살에라도, 34살에라도 찾아올 수 있다. 감정의 소용돌이. 다만 14살이 아닌 다른 나이들에겐, 그런 일을 꾸역꾸역 넘겨 버리고 또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좀 더 습관화되어 있을 뿐.




엔딩에서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고 있는 세 아이가 나온다. 하스미는 말없이 바라보고, 츠다는 몸을 뒤로 확 뉘여 버리며, 호시노는 악 받친 소리를 지른다. 세 아이가 삶에 보였던 반응이 농축되어 있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답지 않게 눈물 날 것 같은 장면이었다.


 상처받았지만 받은지도 모르고, 그래서 돌봐줘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상처받지 않았는데도 아팠던 곳들. 그걸 배울 곳이 없는 한- 아이들에게는 진짜 학교도 집도 없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화면 위로 올라오는 온라인의 대화들은 훌륭한 영화 해설서가 되어 준다.



나는 크면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게 몇 가지 있었는데 다 잊어버렸다. '나는 꼭 어린 시절의 나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크면 그 마음으로 내 아이를 대하고 싶다'고 일기에 몇 번이나 썼던 것 같은데, 어린아이를 대하는 날 보면 영락없이 내가 불만을 가졌던 내 어릴 적 어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나를 반성하고 있으면 가까이 와서 아이들이 나를 북돋아 주는 경험을 오히려 했지, 내 모습은 실망스러운 때가 많았다.


이 영화는 그런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라고 뭉뚱그려 대하지 않는가. 숫자로만, 그냥 관념으로만 상대를 대하지 않는가. 상대는 하나의 세계라는 걸,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을지언정 그 세계 안에서도 언어가 엮이고 숫자가 피어났으며 관찰이 이루어졌고 관계가 맺어졌다는 걸... 너무 쉽게 간과하지 않는가. '요즘 애들', '중2병'이란 단어는 때로는 어쩌면 잔인한 단두대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뭉턱 잘라 버리는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를 읊으면 좋다고 하면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면 너희는 바르게 서 있어야지 하고 호통을 치는 모습은 아닌가.


잠자리 날개처럼 유약하게 파들거리는 아이들. 호시노, 하스미, 츠다, 쿠노- 사사키나 이케다처럼 스쳐 지나간 아이들도, 어른도 예외는 아닐 테니 오사나이나 다른 사람들도. 우리 모두는 작게 떨리는 세계들이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내 안의 진지함을 에테르와 릴리 슈슈에 담아 자못 무거운 단어들로 풀어내고, 외부의 충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터져 나갔던 이 아이들처럼- 마냥 외롭게, 괴롭게, 두려움과 불안함 안에 홀로 있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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