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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27. 2015

빨간 머리라 부르지 마세요

책: <빨간 머리 앤>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아주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주제가가 종종 떠오른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 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살아! 이 노래는 대한민국의 소녀들에게 '굳세게 살라'는 계몽적 느낌은 들지언정 정작 앤이 듣는다면 분명 화낼 것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제목부터가 그랬다. <빨간 머리 앤>, 앤이 그토록 싫어한 빨간 머리를 굳이 넣어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얼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기실 그 이유를 따져 보려면 원작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여사가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반딧불의 묘> 감독이기도 한 다카하타 이사오에게 따져야 한다.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 “그린 게이블스(초록 박공 집)에 사는 앤”이라는 의미만 담고 있어 빨간 머리라곤 한 올도 찾을 수 없으니.


  원제도 아닌데... 앤이 얼마나 빨간 머리를 싫어하는지 알면서 대체 왜 그리 심술궂은 제목을 붙였는지. 아무튼 그 제목 덕분에 한국에도 '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들어왔고 지금까지도 앤은 빨간 머리 앤으로 불리고 있다. 앤이 알면 한숨을 쉴까, 놀라 화를 낼까.


  동화책밖에 모르던 어린 소녀들이 한 번쯤 가슴 설레 보는 잔꽃무늬 드레스, 도시락이 담긴 나무 바구니, 양철 주전자, 푸른 풀밭과 그 위에 만발한 꽃, 레이스, 공단 리본, 진주 같은 것들이 앤의 세계에는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밝고 긍정적인 앤의 성격과 그런 앤을 사랑하는 주변 친구들, 미주알고주알 말은 많아도 악역 없이 그냥 우리네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웃 주민들의 모습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는 이 책은 수많은 소녀들의 꿈과 같은 책이었다. 내게도 앤은 롤 모델이었고, 이 책에 나오는 에이번리는 꿈의 장소 같았다. 지금도 이들의 이야기를 무척 사랑하며, 인생이 지칠 때면 고향 집 방문하듯 책 속 에이번리로 떠나곤 한다.



  갓난아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일을 도와주다가 종내는 '더 받아줄 수가 없다던' 고아원에서 어렵사리 제 몸 기댈 곳을 찾던, 기껏해야 열 살 즈음의 소녀. 앤은 어느 날 에이번리의 그린 게이블스로 입양을 오게 된다. 그러나 정작 매튜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는 농장 일을 도와 줄  남자아이를 구하려다가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잘못됐다는 점에 적잖이 당황한다. 매튜는 한눈에 이 수다쟁이 꼬마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고, 일을 바로잡으려고 앤을 데리고 간 마릴라도 앤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려는 송곳 같은 블루엣 부인을 보고 차마 아이를 그런 집에 보낼 수 없어 앤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앤의 에이번리 생활이 비로소 시작된다.


  막역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던 앤은 다이애나와 “우정의 맹세”를 하며 꿈 하나를 이룬다.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 다이애나뿐 아니라 학교에 가면서 루비와 제인 같은 다른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처음엔 앙숙이었으나 이후 화해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하게 되는 길버트 같은 친구도 사귄다. 린드 부인, 앨런 목사님과 사모님 등 동네 사람들을 알아 가고 친해지고, 그렇게 앤이 관계 맺는 세계는 넓어져 간다.


  그러는 동안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케이크에 넣는다든지, 내기를 하다가 떨어져 다친다든지, 구멍 난 배를 타고 연극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다든지 (길버트가 구해 주었다), 염색약을 사기 당해 머리를 초록색으로 염색하게 된다든지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면서 앤은 자란다.


  그 후 교원 양성 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고, 대학교에 가고, 길버트와 약혼을 하고, 길버트는 의대를 다니고 앤은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해 편지를  주고받고, 결혼을 해 신혼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진행되어 앤이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의 이야기가 대략 10권에 걸쳐 펼쳐진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니 당연히 몇 번이고 영상화되기도 했다. 드라마로 여러 번 나왔고, 그 중 특별히 인기 있던 80년대 드라마를 나는 DVD로도 가지고 있는데 초반부는 볼 만하다가 중간부터 산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원작과 너무 동떨어진 캐스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적인 예로 마릴라가 빼빼 마르고 린드 부인이 몸집이 푸근해야 원작의 설정인데 드라마 캐스팅은 어쩐지 그 반대에 가까워, 린드 부인과 앤이 갈등을 빚는 초반부에서 린드 부인의 마음씨 좋은 푸근함을 느끼기 어렵다. 배우와 캐릭터의 '케미'는 소설이나 웹툰에 원작을 두고 2차 제작을 하는 경우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고 당연히 모두의 마음에 들 수야 없는 거지만, 원작 설정 정도는 따라가 주는 게 성의가 아닐지. 참고로 앤 역할을 맡은 배우에 대해서 큰 잡음은 없었지만, 매튜가 데리고 오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다 큰 앤을 데리고 온다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그래도 이런 건 다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다이애나와 앤이 바람을 맞으며 들판에 서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한껏 눈을 반짝이는 다이애나가 짐짓 감동적인 어투로 말하지만, 그 내용은 원작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매우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다. “내가 길버트를 좋아하는 걸 몰랐니? 너니까 포기한 거야!” 이 대사 때문에 결국 보다 말고 껐다. 원작에선 어릴 때야 길버트가 멋있어서 '모두의 길버트'처럼 아이들이 힐끗거리는 묘사가 나오고 다이애나도 그런 분위기에 취한 대사가 한두 번 정도는 나오지만, 다이애나와 길버트의 러브 라인은 전혀 없다. 다이애나는 오히려 성실한 프레드의 구애를 받으며 얼굴을 붉히다가 일찍 결혼해 사랑스럽고 착한 부부가 된다.


정확히 이 장면은 아닌 것 같지만 뭐 대강 이런 장면이었다.

  사실 드라마 초반에 루비와 길버트가 과하게 가까운 사이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좀 불만이었는데, 원작에서 러브 라인까진 아니어도 남자아이들에게 추파를 잘 던지는 루비가 길버트에게도 몇 번 추파를 던진 적이 있다는 걸 감안할 때 그럭저럭 넘어갈 만 했다면- 다이애나의 그 대사는 도저히 못 참고 보던 DVD를 끄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끝까지 다 보지 못했다.


  2016년 넷플릭스에서 Anne with an E라는 당돌한 제목으로 한 번 더 드라마화되었다. Ann은 싫고 Anne으로 불리고 싶다던 앤 본인의 의지가 담긴 표현을 힘주어 담은 제목이라 <赤毛のアン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보다 훨씬 앤다운 제목이다. 시즌1의 1편은 소설 원작의 토씨까지 담아냈다면, 2편부터는 서서히 각색이 들어가는데 우리가 앤 하면 흔히 떠올리는 고운 풍광보다는 어둡고 무거운 결이다.


  사실 앤이 어려서부터 처한 상황은 방치와 아동 노동 등의 학대였으니 그런 앤의 트라우마를 그려내는 것이 크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페미니즘적 요소가 많다고 수군대는 이들도 있었으나, 앤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girl power를 담아낸 인물이라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는 “배신”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원작에서 은근히 무시하는 뉘앙스 정도로만 표현된 외국인 혐오 문제, 그리고 원작에는 없는 동성애자와 흑인 인권까지 골고루 챙겼다. 세상 모든 인권을 다 챙기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는 않았는데, 중간에 앤의 존재감마저 흐릿해질 만큼 그들에게 집중하는 건 좀 의문이었다. 앤 어디 갔니...? 그래도 캐스팅만큼은 역대 최고가 아닐까? 배우들이 갓 책에서 튀어나온 듯 소설의 묘사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앤은 외모뿐 아니라 화법마저 그대로다. 무조건 사랑스럽게만 그려지던 앤의 뜨악한 면들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무척 만족스럽다. 그 모습조차 사랑하는 앤의 팬으로서.


  한편 처음에 언급한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누구나 대체로 호평이다. 비록 앤 1권의 분량만 50화에 나눠 담다 보니 속전속결의 진행이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다소 전개가 느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79년에 최초 방영된 작품임을 감안하면 그건 작품 잘못이 아니라 '빨리빨리'에 지나치게 길들여져 버린 눈이 잘못이다. 게다가 느려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이자 애니메이션이 호평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 배경에 있다.


  실제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방문해 상세히 관찰하고 만든 배경은 섬 풍경을 자연스럽게 잘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데, 섬을 전혀 방문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에이번리 사람들이 사는 소박한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딱인 편안한 모습이어서 좋았다. 앤이 먹는 음식, 앤이 사는 집 가구들, 앤이 뛰어다니는 과수원과 숲... 곱게도 펼쳐져 있어 그걸 들여다보면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참고로 이때 작화 감독을 맡은 사람이 콘도 요시후미인데, 199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1995년 개봉한 <귀를 기울이면>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귀를 기울이면>도 그 아름다운 내용만큼이나 섬세한 배경이 돋보이는 수작인데, 앤 애니메이션과 묶어 감독으로서의 그를 생각했을 때 그 이른 죽음이 암만 생각해도 아깝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력한 후계자였다는 이야기가 괜한 소리는 아닌 듯하다.



  그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실제로 가면 그린 게이블스를 만들어 놓았고 그 안에 있는 앤의 방, 매튜의 방, 마릴라의 방, 부엌 등도 모두 잘 갖춰 놓아 누구나 앤의 세계로 쉬이 빠져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서 앤이 이름 붙인 연인의 오솔길이나 유령의 숲과 비슷한 장소들도 많이 보여 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 꼭 가보는 게 꿈이었는데, 너무 멀어서 갈 수 있는 날이 올 지 모르겠다.



  이토록 섬의 풍경이 책에 속속들이 녹아 있는 건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실제 고향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기 때문이다. 몽고메리가 태어난 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이나 묘 등도 모두 그 섬에 있다. 몽고메리는 앤을 쓸 때 자기 삶에서 참고한 내용도 꽤 많은데 뭐 그건 작가라면 자연스럽게 담게 되는 내용일 뿐 몽고메리가 앤의 모델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한 여배우의 사진을 붙여 놓고 썼다고 하고, 성격이나 처한 상황에 있어서는 앤이 몽고메리의 모델이었다고 보는 게 적합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몽고메리가 쓴 다른 단편들을 읽을 때 느껴지는 비슷한 구조 때문이다. “외롭게 지내는 어린 아이”, “고아”, “사랑받지 못하는 미혼 여자” 등의 캐릭터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지내다 그가 가진 재능, 사랑스러운 면 같은 것들을 누군가가 알아보는 내용이 거의 항상 있다. 그 누군가는 대개 “돌아가신 부모님의 막역한 친구”, “부모님 유언을 들은 사람”이나  “대부”, “돈이 많지만 외로워서 사랑 줄 사람을 찾던 어떤 할머니” 등등이다. 그래서 여태까지 미운 오리 새끼 취급하던 사람들을 보란 듯이 뒤로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사실 단편집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습작 노트를 읽는다는 기분이 들 만큼 비슷하고 엉성한 이야기들이 몇 번이나 꾸려지는데, 이러한 습작 끝에 앤이 터져 나온 게 아닐까, 개인적으론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또 다른 장편인 <블루 캐슬>도 뭐 따지자면 큼직한 구조는 같다. <사랑의 유산>에도 그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걸 생각하면 단순히 우연이라고 넘길 수는 없다.



  몽고메리는 사실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글쓰기로  보상받은 건 아닐까?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져, 마치 에이번리 같은 작은 마을의 농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기를 알아보고 그 사랑스러움을 발견해 애정 표현해 주고 더 큰 꿈을 펼칠 만한 곳으로 데려가 줄 만한 누군가를 기다린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보상 심리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예쁘지 않았어도 주변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할 만큼 사랑스러운 앤을 만들어낸 건 아니었을까 싶다.



  몽고메리가 그렇게 빚어낸 앤은 지금도 수많은 소녀들이 자기 유년기 깊숙한 곳에 틀어박아 두었던 외로움을 토닥여 주는 친구가 되고 있다. 앤뿐 아니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에이번리 마을 자체가 그렇게 푸근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다.


  나 또한 앤이 신혼집으로 옮겨 가면서부터는 확실히 집 떠난 듯 쓸쓸한 기분을 한 구석에 느끼며 읽곤 했으니. 내가 사랑한 건 앤뿐이 아니라 앤이 살던 에이번리의 따스한 모습이었고, 그건 아마 내가 나고 자란 작은 마을의 정취를 닮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마음속에 내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방 하나쯤 두고 산다면, 그리고 그 방 문을 열었을 때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풍경과 사람들이 날 맞아주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앤은 오늘도 세상에 존재 가치를 빛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제 앤보다는 다른 책을 읽는데 더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한창 낭만주의자였던 고등학생 때 대학교 자기소개서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은?'이라는 질문에 차마 빨간 머리 앤 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할 말을 잃었지만,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그 대학이 원하는 인재 상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당연히 떨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앤을 사랑한다.


  그래서 앤을 더 소개하고 싶고, 더 자랑하고 싶다. 가장 좋은 말을 골라 내 이름으로 앤을 완역한 책을 내는 건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꿈이고, (그래서 영어통번역을 선택했으나 이걸 하려면 영문학을 했어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은 여전히 내가  꿈꾸는 여행지다. 꿈꾼 지 어언 1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까지는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앤이 말하듯 기대하다가 실망하더라도 기대하는 게 더 좋다. 대단한 일이 없이, 진주 목걸이의 진주알들이 촘촘하게 이어지듯 소박하게 흘러가는 이 날들을 즐기는 것 또한 앤을 애독하는 길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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