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영화 <여행과 나날>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미야케 쇼

CAST. 심은경, 카와이 유미, 타카타 만사쿠, 츠츠미 신이치 외

SYNOPSIS.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

슬럼프에 빠진 각본가 ‘이’는 어쩌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말로부터 도망치듯 설국의 작은 마을로 떠난다.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 속 여관을 찾은 ‘이’는 수상할 만큼 무심한 주인 ‘벤조’와 머물게 되고 이윽고 폭설이 쏟아지는 밤, 어쩌다 ‘벤조’를 따라 나선 ‘이’에게 긴 꿈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범한 여행이 특별한 나날이 되는 <여행과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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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라곤 딱히 없는 여행지. 호젓하게 혼자 걸어 다니며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 달그락달그락 낯선 식당의 부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먹는 따뜻한 식사. 연필을 슥슥 그을 때 나는 소리.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을 닮았다. 그런 무위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따금 혼자 조용히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애초에 영화가 하얀 노트에 연필로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각본 속 여자의 여름 이야기 또한 자박자박 걸어 다니는 것으로 펼쳐진다. 문득 들어간 박물관 속 사진들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 있지만 여자에게 그곳은 일상 공간이 아니다. 바깥을 나오면 초록과 바람과 물이 펼쳐지고 이내 바닷가에서 남자를 조우하는데, 짤막한 대화로 두 사람 모두에게 이곳은 비일상의 공간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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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에서는 고운 장면들로 풀어지던 그 낯섦의 감각이, 정작 각본가 이의 삶에서는 영 어설프게 풀어진다. 아주 불화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상처 입은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내 자리가 내게 꼭 들어맞는다는 기분도 들지 않는 것. 꼭 이 각본가처럼 외국에서 외국어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삶에 대해 한번쯤은 느끼는 감정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멋지게 꼭 들어맞는 자리처럼 보이는, 아무 문제 없이 그저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란 주변의 사물이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는 그걸 말에 쫓기는 것, 말에 갇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여행을 그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로 생각해 본다. 각본가인 그의 직업을 고려하면, '말'이라는 단어의 자리에 우리 삶의 무게를 담은 어떤 단어라도 바꿔 끼울 수 있을 것이다. 일, 공부, 루틴, 심지어 갓생 같은 단어들조차도. (사실 갓생이라는 단어 뒤에는 강박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진짜 '갓생'으로 비유하는 일상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은 '갓생'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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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 유명한 <설국> 첫 문장을 방불케 하는 모양으로 터널을 벗어나면 설경이 펼쳐진다. 강바람과 눈발이 스산해 보이지만, 낯선 감각에 둘러싸이는 시간은 결국 일상의 더께를 벗어내는 시간이라는 지점에서 더없이 산뜻한 시간이기도 하다. 거의 유튜브 ASMR 영상에서나 들을 법한 부엌의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들으며, 책 한 권 들고 기다린 음식을 천천히 먹는 장면도 그렇다. 이 여행의 유일한 단점은 숙박업소가 다 만실이라 졸지에 지도 바깥에나 위치하는 산의 낡은 여관까지 찾아가야 했다는 것인데, 이 또한 결국 일상의 더께를 벗어내는 시간의 연장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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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의 영화들이 담는 공간들을 참 좋아하는데, 이유는 공간을 훑어보기만 해도 이야기가 줄줄 묻어나는 것 같아서다. 공간을 묘사해 문장으로 담아내면 그대로 짤막한 소설의 도입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앉아있는 내내 마음으로 문장을 읽듯 읽게 되는 공간들이다. 화려하지 않고, 쇠락한 곳도 많지만, 미야케 쇼의 공간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건넨다. 이가 찾아간 벤조의 여관도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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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해선 만날 일이 없었을 두 사람은 나름대로 닮은 존재들이다. 각각 혼자서는 어떤 슬럼프 비슷한 것에 빠져 있다는 점. 하지만 슬럼프라는 단어도 좀 사치스러울 만큼, 애매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아플 거면 확 앓고 일어나면 좋겠는데 애매하게 컨디션이 난조여서 쉬지도 못하고 뭘 하지도 못하는 사람 같은 상태다.


번아웃까지 가지 않아도, 난 이제 끝난 걸까 하는 고독과 불안이 맺히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를 만나는 게 좋은 이유는 나 자신에게는 좀처럼 해줄 수 없는 말이 쉽게 나오기 때문이다. "뭐라도 하는 게 낫다"라고 말할 수 있고, 무모한 발걸음도 이따금 떼게 된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런 발걸음을 조우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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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사람이 어두운 천변에서 서로 괜찮은지 묻고 답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흰 눈이 반사하는 빛에 기대 뚜벅뚜벅 걷는 모습. 그게 그냥 삶 같아서 좋았다.


상처 같지 않은 상처, 치유 같지 않은 치유. 생각해 보면 마치 기업의 보고서처럼 배경과 결과물이 깔끔하게 각 잡혀 나오는 순간이 우리 삶에 얼마나 되나. 여행도 그렇다. 설령 랜드마크를 따라가는 여행이라고 해도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은 길 위다. 미술관도 온천도 가지 않고 단지 강물이나 보고 눈이나 보고 그런 호젓한 시간을 잘 보낼 필요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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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혼자만의 겨울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었고, 인생의 반절을 사랑한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였다. 영화 OST 앨범을 재생해 귀에 꽂고, 하루 종일 몸이 다 얼도록 눈을 맞으며 걸어 다녔다. 고요한 길목을 지날 땐 눈이 내려 겉옷에 부딪는 쌉쌀한 소리가 귀에 톡톡 들어왔다. 그러다 너무 추워질 때쯤 문학관과 미술관을 겸한 건물에 들어가,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그림을 보고, '시민 작가'가 직접 찍은 도시 사진을 보았다. 사람이라곤 없는 전시실이었고 마침 작가만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싶어 했고, 나는 무슨 이야기를 꼭 듣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 안의 작가가 만족했으면 하는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덕분에 그날 처음 가본 낯선 도시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었다. 마땅히 한 건 없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여행을 잊지 못한다. 언젠가 비슷한 여행을 또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어딘가 훌쩍 떠나서 노트를 반듯하게 펴고 연필을 쥐고 무어라도 쓰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설프고 무의미한 발자국을 남기면서도 나날들은 계속되니까. 특별한 여행이 아니라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은 소금 같은 별과 사막 낙타만이 가는 길에도 있지만, 아무도 없는 눈길에도 있다. 아무튼 그 길은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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