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회 진짜 합니다

by 선이정

다시 기차 안입니다

지금 여기는 전주로 가는 기차 안입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 가을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작한 이 글을 봄과 여름 사이 초록이 흐드러진 계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무리하게 되었어요. 그 사이 저는 영화제에 가면서도 가방에 명함을 챙겨 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업 명함 말고, 작년에 감독님 인터뷰 직전에 부랴부랴 찍은 명함이에요. 이제는 글 쓰는 사람으로도 명함이 필요하겠기에,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들었습니다. 제 명함에는 고심하여 고른 문장들이 적혀 있어요.


여기에 이야기가 있다

Here dwells the story

Ici vit l'histore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여기에 이야기가 있고, 머무르고, 살아가고, 다시 시작된다는 문장입니다.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다시 한국어. 활판 인쇄가 불가하여 아쉽게 못 넣은 일본어 문장에서는 "宿る", 숙박한다는 뜻이지만 깃들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동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동사들로 이야기가 삶에 모이고 흐르고 빛나는 순간들을 담고 싶었어요. 순전히 자기만족으로 욕심껏 담아 보았습니다.


오늘은 명함과 함께 포스터까지 가방에 넣고 출발합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홍보물이 놓여 있는 구간에서 늘 곧 개봉할 영화 엽서나 아카데미극장의 상황을 알리는 종이를 하나씩 집어 들기만 했는데, 제가 그 자리에 무언가를 놓는다니 기분이 신기합니다. 앞면에는 포스터, 뒷면에는 일시장소와 함께 상영회 안내 페이지, 인디스페이스 예매 페이지 QR이 담겨 있어요. 며칠 전에 밤 12시 넘어 감기는 눈으로 만들었더니 레이아웃이 좀 이상하긴 한데... 포스터도 최종 수정 전 버전이기는 한데... 일단 아쉬운 건 다음 인쇄 때 채우기로 하고...



잠시 멈추고, 감사한 마음을 세어봅니다

여기까지 쓰고 부산한 마음과 손을 잠시 멈춥니다. 창밖을 봅니다. 제가 일하고 영화 보고 사람을 만나던 공간들이 차창 밖으로 조그맣게 멀어져 갑니다. 마치 반년 전 부산을 출발하던 기차에서 지금 이 기차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긴 꿈에서 깬 것처럼, 지난 몇 개월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징검다리를 건너듯, 한 걸음씩 나아왔습니다. 다행히 한 발짝 발을 떼면, 그다음 발자국이 어디로 가야 할지 친절히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덕분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수상 소감 같지만, 사실 앞으로도 한 달 남짓한 시간이 남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도움에 기대야 하겠지요.


지금껏 '어떻게 이렇게 성공 가도만 걸을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생에 드물게 승승장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소속되어 글 쓰는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아낌없는 조언과 지지를 보내주신 것도, 1인 플레이어로 존재감과 정체성이 너무나 명확한 시네마토그래프에서 공동 기획으로 함께해 주신 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가 만나는 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대관 일정을 잡아주신 것도, 사려 깊은 감성의 디자인을 구사하는 친구 김토일이 포스터 디자인을 맡아준 것도. 지지자 기반의 커뮤니티로 세상이 연결되고 새로운 일들이 열리는 판이 짜이는 공간 베이크에서 이 영화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수단을 내어주신 것도, 커뮤니티와 행사를 본업으로 하는 친구가 진행 과정 중간중간을 다잡아 주면서 챙겨주는 것도, 모든 과정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에 공감해 주고 함께할 구석을 찾아주는 주변 사람들도...


너무 과분할 정도의 행운에 얼떨떨하다 못해, 이 분들이 기꺼이 물심양면으로 보내주신 마음에 미안해질 정도였지만. 이것은 제가 아니라 파템을 향한, 더 나아가 분쟁 상황에서 사람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므로 기꺼이 받아 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겉옷처럼 그 마음을 벗어 내어 줄 때, 그 마음을 받아 들고 걸어 둘 곳을 마련하는 것 또한 이 상영회의 역할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크고 작은 마음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상영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상영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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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저 포스터를 공개합니다. 다음 편에는 메인 포스터와 함께, 여러분이 이 상영회에 같이 하실 수 있는 방법도 소개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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