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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05. 2016

HIV부터 AIDS까지

인도 사는 써니디디 이야기 번외 편

  인도에 가기 전 내게 HIV/AIDS라고 하면 “잘 모르지만 아무튼 죽을병, 그리고 옮을까 봐 무서운 병” 정도의 막연한 그림밖에 없었다. 한 발짝 더 나아가도 “옮는  경로가 좀... 그런 병” 정도의 얇디얇은 인식.


  우리는 HIV라는 이름을 두려워하고, 평생 나와 상관이 없기를 바라며, 마약이나 부적절한 성 관계 등으로 전염되는 병이 아닌가 하고 적당한 선을 긋고 산다. 특별히 관심 가질 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그 정도만 알고 살기가 쉬운 것 같다.


  실제로 내 브런치 유입 키워드에 'HIV 감염 여부 검사', 'HIV 감염 잘 보는 곳' 등이 있는 걸 보면서, 이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검색어를 썼을까 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대한 염려로 마음이 착잡해지곤 했다.


  그래서 인도 사는 써니디디 이야기의 번외 편으로 HIV와 AIDS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쓰려 한다. 다만 이 글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HIV/AIDS 환자보다는 아프리카나 인도의 HIV/AIDS 환자들을 중심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여 읽어 주시기 바란다.


  우선 HIV란 인체 면역 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로, 사람의 면역력을 무너뜨리는 바이러스다.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HIV 보균자는 모두 AIDS라고 생각하는 점인데, 둘은 다른 단어다.


  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즉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은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병'이라기보다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에 가까운데 HIV를 보균한 상태에서 점차 면역력이 떨어지고 이에 따라 여러 증상이 보이게 되면 AIDS로 진단한다.


  이렇게 쓰는 건 위키백과도 할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딱딱하고 어려워 무슨 말인지 잘 와 닿지 않는다. 이제 HIV가 감염되는 과정을 하나씩 붙잡고 살펴보자.


  우선 HIV의 주요 감염 경로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과 성의 접촉, 피와 피의 접촉, 모체 감염이다. 내가 있던 인도의 경우를 예로 들면 '성 관계를 통해 88.7%, 수혈을 통해 1%, 주사기 재사용을 통해 1.6%, 모체 감염 5.4%' 정도로 정리가 된다. (NACO, 2010/시간도 흘렀고 지역별 차이도 있지만 큼직한 흐름만 보아 두자.) 정액이나 질액 등의 체액 혹은 혈액이 주 감염 경로인 셈이다.


  HIV 보균자가 있는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다가 옮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HIV는 '인체' 면역 결핍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잠시만 노출되어도 죽는다. 즉 같은 모기에 물린다든지, 보균자가 한참 전에 흘린 피를 지금 내가 만진다든지 하는 일로는 여간해선 전염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상대방에게서 피가 나는데 내 몸에도 상처가 있어 맞닿았을 경우라면 위험하지겠지만 살면서 그런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변기를 사용한다든지, 같은 접시에 음식을 먹는다든지, 보균자의 땀이나 눈물에 접촉한다든지 하는 일로는 절대 감염되지 않는다.


  엄마가 HIV 보균자라고 아이가 “반드시” 감염되는 것도 아니다. 엄마와 복중 태아가 혈액형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엄마와 아이의 피가 섞이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태반이 형성되고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뱃속에서는 피가 섞일 일이 없다.


  그러나 분만 혹은 모유 수유 과정에서 보균자가 되는 경우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HIV 보균자의 경우 제왕절개 수술과 분유를 권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몇 달 생활비를 훌쩍 뛰어넘는 수술비를 냉큼 내기 쉽지 않다. 의사 권고를 무시하고 자연 분만을 하거나 모유 수유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모체 감염 비율은 대략 25%로 추산한다. 슬픈 이야기지만 이런 아이들은 오래 살기 힘들다. 단단한 벽을 쌓아 올렸다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벽을 쌓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공격을 받는다면 그 벽이 오래가긴 힘든 일이니까.


  이 '감염'이 일어나는 동안 실제로 우리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HIV가 우리 몸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그리고 그 이후 '면역 결핍' 상태가 될 때까지 우리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차근차근 알아보자.


  우선 HIV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면역 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백혈구'도 알아야 한다. 백혈구는 우리 몸을 질병과 바이러스로부터 지켜내는 군대와도 같다. 백혈구는 여러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T 세포, B 세포, CD4 세포가 그 군대의 구성원이다.


  T 세포K 세포라고도하는데 이 K는 Killer다. 군대로 치면 보병이다. 직접 칼 들고 창 들고 와~ 하고 우르르 뛰어가는 역할, 즉 바이러스나 질병이 들어오면 뛰어가서 직접 싸우는 세포들이다.


  B 세포는 군대로 치면 포병이다. T 세포처럼 직접 달려드는 게 아니라 멀리서 대포를 쏘듯 액체를 쏘아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이 B 세포가 쏘는 액체가 바로 많이 들어 보았을 '항체(Antibody)'다.


  CD4 세포는 파수꾼 겸 지휘자 역할이다. 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걸 빠르게 인식하고 다른 세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뇌부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세포 공장 역할까지 맡고 있는 매우 중요한 세포다. DNA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포를 찍어낸다. 머리카락이 빠진다든지, 피부의 죽은 부분이 먼지로 날아간다든지 한 자리에 새로운 세포를 쏙쏙 채워 넣어 주는 역할이다.


  백혈구의 구조를 이해했다면 이제 HIV가 체내에 들어오는 경로를 따라가 보자. HIV는 체내에 유입될 때 교묘한 속임수를 쓴다. 껍데기처럼 가짜 몸체를 뒤집어쓰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는 미네랄이나 영양분처럼 보여서, CD4 세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에너지원으로 흡수하고 싶어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CD4 세포는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에너지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HIV에 들러붙는데, HIV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CD4 세포가 떨어질 수 없도록 꽉 붙잡는다. 그리고 가짜 몸체를 열고 진짜 바이러스를 CD4 세포 안으로 집어넣는다.


  이러면 군대의 수뇌부를 적에게 점령당하는 셈이다. CD4 세포가 아무 지시를 주지 않기 때문에, T 세포와 B 세포도 멀뚱멀뚱 있을 뿐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공격하지 못한다. 이렇게 인체의 면역력은 멈춰 버린다.


  거기 그치지 않고 HIV는 CD4 세포가 갖고 있는 DNA를 슬쩍 잘라 그 사이에 자기 RNA를 집어넣는다. HIV는 원래 DNA가 없고 RNA만 있기 때문에 자가 복제가 불가능하므로, CD4 세포 공장에 인체에 필요한 세포 대신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CD4 세포는 이제 HIV 복제 공장이 되었고, CD4 세포는 아무 에너지원도 얻지 못한 채 한참 HIV만 복제하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CD4 세포는 줄어들고 HIV 세포는 늘어난다.


  정상인의 CD4 세포 수는 약 2,000 가량인데, 350 혹은 300 이하일 경우 AIDS 판정이 난다. 상태가 심각해지면 나중에는 16이라든지 9라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보게 되기도 한다.


실제 한 환자의 CD4 세포 기록. 인도에서는 공립 병원에 가서 6개월에 한 번씩 CD4 세포를 체크하도록 되어 있다.


  HIV가 인체에 들어오게 되면 처음 6개월 정도'제1기'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WINDOW PERIOD라고도 부르는데, 바이러스가 창문을 열고 체내에 들어오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감 증상 비슷하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이 시기에 HIV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세계 최고의 HIV/AIDS 창궐 지역이 1순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2순위 인도임을 감안할 때- HIV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독감 증상 좀 보인다고 병원을 가리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다. 당장 나만 해도 감기 기운이 있으면 쉬고 말지 병원은 잘 안 가는데, 하루 일을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이 병원을 갈 리가 없다.


  설령 병원을 간다고 해도 이 단계에서 HIV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으며, 백번 양보에 HIV 검사를 받는다 해도 결과가 꼭 정확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신기하게도 이 시기에는 몸 안에 HIV가 있더라도 양성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HIV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의 경우, 이 시기에 검사를 하더라도 6개월 이후 재검사를 권장하고 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제2기, 잠복기가 온다. ASYMPTOMIC PERIOD, 무증상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데, 이름 그대로 HIV가 몸 안에서는 증식을 쑥쑥 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렇다 할 증상이 없는 시기이다.


  이때까지는 HIV 비감염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HIV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가기도 쉽고, 그러다 보니 감염 위험도 높다. 이 시기는 사람에 따라 1년부터 10년 넘는 경우까지 제각각이다. 평상시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는 사람과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사람의 경우는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얼마 간의 잠복기가 지나가면 제3기, 증상기가 온다. 문자 그대로 SYMPTOMIC PERIOD. 여기서 '증상'이라 하는 건 '이 병의 경우 이러이러한 증상이 옵니다'라고 뚜렷하게 말하기 어렵다.


  흔히 에이즈라고 하면 붉은 반점이라든지 피부 질환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많이  주워듣지만, HIV가 실제로 인체에서 하는 일은 면역력을 무너뜨리는 일이라서 그 무너진 성벽을 타고 다른 바이러스와 질환들이 마구 들어오면 그게 증상이 되는 거다.


  HIV 진행을 저지하기 위해 먹는 약의 부작용이 상당하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정확하게 무 자르듯 '이건 여기서 온 증세, 이건 저기서 온 증세'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처방전에 또박또박 적을 수 있는 감기, B형 간염, 결핵(TB) 등의 이름보다는 "이상하게 계속 아프고 낫질 않더라"는 문장을 '증상'이라 할 수 있겠다.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 HIV 테스트를 해 보는 것이고, 인도나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은 이 단계까지 이르러서야 자기가 HIV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 HIV가 체내에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HIV를 옮겼는지도 알 수 없다.


  실제로 남편들이 매춘으로 HIV를 옮아 와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옮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HIV/AIDS 사업장에는 과부 가정이 많다. 남편이 죽을 때까지도 이유를 몰랐던 아내는 나중에 자기 몸으로 남편의 사망 이유를 깨닫게 된다. 소름 끼치고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AIDS제4기라고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이야기했듯 CD4 세포가 350 이하라면 보통 AIDS라고 하지만 무 자르듯 350 이상과 이하로 딱 잘라 말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HIV가 한 번 인체에 들어오면 (여태까지는)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이, 상태가 진행되기만 할 뿐이다. 약을 써서 HIV를 저지하고 상태를 호전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 통용되는 방법에서는 거기까지다.


인도 공립 병원에서 나누어 주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

  그 '약'을 쓰는 게 바로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요법(AntiRetroViral Treatment; 이하 ART)이다. HIV가 CD4 세포로 들어가려고 하고, DNA를 자르고 자기 RNA를 끼워 넣으려고 하는 그 모든 과정마다 보호막처럼 작용하는 약이 ARV, 항레트로바이러스제다.


  그러나 ART 사용도 쉽지만은 않다. 우선 약 자체가 매우 비싸고 부작용이 많은 약이다. 인도의 경우 공립 병원에 HIV/AIDS 환자로 등록을 하고 ART 약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는 있는데, 이 약은 매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복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루 2번이라고 한다면 대강 식후 30분이 아니라 아침 7시 저녁 7시 정도로 정확해야 한다.


  일이 바쁜 어른들도, 이 약을 왜 먹어야 하는지조차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이 약을 챙겨 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용법과 용량을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 몇 번 놓치면 그 사이 내성이 생겨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4개밖에 되지 않는 라인에서 조합을 바꾸어 약을 사용해야 하는데, 인도 공립 병원에서는 2번째 라인부터 제공하지 않는다. 비싼 약값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맞지 않는 첫 번째 라인에서만 약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부작용에 기억 상실이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가진 거 다 팔아도 약을 바꾸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는 없는 약이다.


  그렇다면 HIV/AIDS를 예방할 수는 없을까?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하지 않는 것이다. 주사기를 이용한 마약도, 여러 사람과의 성관계도, 성매매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우간다의 HIV/에이즈 감소를 이끌어낸 당시 무세베니 대통령과 그 부인은 이를 ABC로 말했다. “성관계를 자제(Abstain)”하고 “배우자에게 충실(Be faithful)”하며 그 두 가지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콘돔(Condom)”을 사용하라는 것을 기억하기 쉽게 묶은 것이다.


  관련 검색어에 예방책 이야기가 많아 이 내용을 추가해 둔다. 세계적으로 에이즈 신규 감염률이 감소세를 타는 동안에도 우리나라의 감염률은 꾸준히 증가했으며, 감염자 90% 이상이 남성이라는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이 독특한 양상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하나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성매매 시장 규모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혹시나 불안에 떨며 이 글을 술렁술렁 넘기고 계신 분이 있다면, ABC의 중요성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상용화된 치료책이 뚜렷하지 않은 에이즈는 예방이 제일 중요하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에이즈 감염의 양상도 다르다. 얼마 전 본 기사에서는 한동안 감소세였던 아프리카 지역의 에이즈 신규 감염률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경제난으로 삶이 궁지에 몰린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매매 시장에 내몰려 나이 든 남자들에게 에이즈를 옮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이 이렇게 되는 모습이 개인적으론 가장 마음 아프다.


  한국에서도 랜덤 채팅을 이용한 성매매 때문에 중학생에게서 양성 반응이 나와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 “에이즈”가 오르내렸던 적이 있다. 잘못을 했다한들 아직 어린 아이인데 너무나 안타깝다. 본인은 성인이면서 그 어린 아이를 잘 가르쳐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 남성들에게 화가 날 뿐이다. 처참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이제는 에이즈를 극복하고 싶다는 인류의 희망이 UN에서 발표하는 목표나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아직 우리는 에이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머나먼 타국의 일만도 아니고 지난 세기의 역사도 아니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차피 죽을 사람들을 왜 도와요? 그것도 외국까지 가서?” 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내가 인도에서 만난 HIV/AIDS 사업장의 사람들은 결코 나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기구한 사연을 끌어안고  눈물짓기는 많이 했으나, NGO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퍼준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게 단순하고 나이브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힘이 없지만 역설적으로 강했다. 자기가 얼마나 약한지 알기에, 언제 스러질지 모를 불꽃이라는 걸 알기에 제 자식 제 가족 제 사랑 걱정에 더욱 다부지게 서서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NGO에서 매달 쌀을 비롯한 작은 식량 패키지를 현물 지원하고 아이들 학비를 대신 납부했는데, 이는 퍼 주는 마음이 아니라 이들이 설 수 있는 힘을 보태주는 마음이었다.


  안쓰럽고 안타깝다고 퍼 주며 이들의 그 강인함을 꿇어 앉힌 게 아니라, 이들이 더 강인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함께 섰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건 맞다. 그러나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 반드시 한 번 죽음과 직면할 것이며, 그 날까지 남은 날은 하루하루 줄어가고 있다.


  HIV/AIDS를 끌어안고 사는 삶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해요?”라며 울던, 남자 가족들이 끌어내서 창녀가 되었다는 여자들의 삶. HIV/AIDS 때문에 고향 땅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사는 가족의 삶, 격일로 나가는 일조차 몸에 버거워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우는 아줌마의 삶, 그 와중에도 당장 내일 먹을 야채 값과 다음 달 아이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의 삶, 그 와중에도 남편의 주폭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삶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고단한 이야기가 하나하나 얼마나 아픈지.


  물론 이들이 순진무구하고 고결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불의한 의사, 고리대금업자, 남편의 바이러스에 대해 함구하면서 새신부를 속인 시댁 식구, 새로운 신부 지참금을 노리고 아내를 버린 남편, 아이는 나몰라라 한 채 HIV를 품고도 날마다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서는 과부... 수없이 변조되는 이들의 이야기 안에는 각자의 잘못도 분명 존재한다. 그중에는 현재 진행형인 잘못도 많다.


  그러나 그 각자의 잘못을 회복할 기회조차 없을 만큼, 어그러진 구조가 떡 버티고 서 있다. 거기서 이들의 도덕적 결함'만'을 탓하는 건 의미가 없다. 사실 이들의 성적 도덕적 의식이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뭐 그렇게 다르겠는가. 죄 없는 자가 돌 던지라고 했는데.


  이들은 HIV라는 사기꾼에게 삶을 사기당한 피해자들이다. 삶의 조각조각을 야금야금 차압당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에도 HIV/AIDS 환자들이 있는데 왜 유독 특정 지역에서만 어려움이 두드러지는지 우리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지역의 문화적 배경이, 때로는 그 지역의 경제적 상황이 그들을 옥죄이는 걸 보게 된다면 오늘 내 통장 잔고를 조금 줄여 그들의 삶에 응원을 한 다발 보내 주어도 나쁠 건 없다.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돌은 던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나약하게 살면서 후원금  받아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응원받으 마땅할 만큼 열심히 살고 있는” 엄마고 아빠니까.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것 못지않게 HIV/AIDS가 인체에 밀고 들어오는 그 절망감과 괴로움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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