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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05. 2016

그 밤 우리가 목격한 것은

영화: 목격자의 밤(2012, 박근범 감독, 변요한 주연)

스포일러 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검색해 보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으니 이참에 한번 보시는 것도 좋겠죠! :-)


<목격자의 밤>에서는 꼭 단편 독립 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변두리 냄새가 물씬 풍긴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번 학기 등록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제적될 위기에 있는 주인공 지훈뿐 아니라 그의 집, 그가 사는 동네 마주치는 면면이 모두 그렇다. 지훈은 묵묵하고 성실하다. 폐기 처리되어야 하는 샌드위치를 가지고 와서 동네 아이 현수에게 ‘더 가져가도 돼’ 하며 나눠줄 만큼 싹싹한 구석도 있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그렇게 싹싹하게 와 닿지 않는다. 사무적인 말씨조차 잃어버릴 만큼 똑같은 질문에 시달린 나머지, 조교는 지훈을 ‘사람’보다 ‘일감’으로 처리한다. 쿡쿡 찌르는 듯한 말투로 교생 실습 나가시려면 등록하셔야 해요, 하며 내미는  마감 날짜는 서슬 퍼렇다. 좁은 방 천장에는 곰팡이가 궁기와 함께 얼룩덜룩 묻어 있고,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채울 수 없는 남동생과 가난한 뒷모습의 할머니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름의 가장이다.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도 어떻게 답이 나오지 않는, 한숨 나오는 삶이다.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도 말끔한 맛이라곤 없다. 라면 통을 차고 나가는 아저씨, 갑자기 우욱 토를 하는 취객, 어설픈 화장을 한 눈을 치뜨며 어떻게든 술이나 담배를 뚫어 보려는 고등학생... 편의점 시급 받고 일하기엔 억울하다 싶을 만큼 사건 사고가 많다. 지훈은 그런 손님들을 대처하는 게 익숙하다. 토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잔반통을 들고 주변을 맴돌고, 도둑질을 할 것 같으면 반사경까지 십분 이용해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관찰하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지훈에게도 그런 일이 찾아왔다. 편의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 중 단연 가장 큰 일, 뺑소니 교통사고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훈의 그 관찰하는 시선 덕분에 뺑소니를 겨우 벗어난, 어딘가 찝찝한 교통사고.

그렇게 지훈은, 팍팍한 삶에서 갑자기 엉거주춤 ‘목격자’ 자리에 끌어 앉혀졌다. 교통사고 피해자는 편의점에서 막 나간 손님이었다. 허름한 옷차림과 엉성하게 틀어 올린 노란 머리가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 여자였다. 어딘가에 취한 듯 기운 없이 비틀리는 발걸음에 여자는 토하는 취객일 수도, 도둑질을 앞둔 사람일 수도 있어 보여서 지훈은 또 통을 들고 긴장을 했지만 여자는 의외로 평범하게 물건을 사고 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특이한 게 있다면 빳빳하게 펴진 돈이 아니라 꼬깃꼬깃 꽃처럼 뭉쳐 있었다는 거다. 착한 지훈은 거기에 벌컥 화를 내거나 욕을 걸쭉하게 뱉지도 않는다. 그저 약간 귀찮아하는 정도, 별 개의치 않으며 돈을 펴려던 그때 교통사고는 일어났다. 적막한 새벽을 가르는 자동차 소리. 편의점을 야무지게 지키며 이것저것을 ‘목격’하는 게 직업이었던 지훈이 목격하지 않으려고 해도 않을 수가 없는 사고였다.


그러나 사고는 이내 사건으로 번졌다. 사고가 사건이 되는 건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되는 한 순간이다. 검은색 그랜저 핸들을 따각거리는 알반지 낀 손이 그 의지였다. 조용한 새벽의 유일한 목격자, 그러나 여전히 묵묵하게 성실한 지훈의 뒤로 그 ‘의지’가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깨뜨린 맥주병은 실수라기보다 지훈을 향한 위협처럼 살벌하다. 아직 전화 안 했지? 하는 물음, 필시 돈뭉치일 게 분명한 검은 비닐봉지도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목적을 성사하기 위해 지훈에게 으르렁거리는 짐승 같은 얼굴은 검은색 그랜저 차량과 겹치면서 조폭이나 ‘뭐 그런’ 직업들을 연상케 한다.

지훈은 거절하지만 그 거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훈은 여전히 묵묵히 성실해서 그 돈을 받고도 식구들에게 삼겹살을 구워 먹이고 등록금을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지만, 만약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면 분명 괴로워하는 얼굴로 ‘별 수 없었다’는 대답을 할 것 같다. 그만큼 그에게는 별 수가 없었다. 돈 나올 구멍은 없었고 당장 돈이 나가야 할 일은 수두룩했다. 면접 자리에서 그는 수학 교사 자리가 다 찼으니 ‘윤리도 괜찮지?’라는 질문을 받고 어정쩡하게 네... 대답을 한다. 수학교육과를 나왔지만, 수학과 윤리는 아예 비슷도 안 한 과목이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별 수가 없다. 더불어 이 질문이 과연 지훈에게만 던져질 질문인지, 우리 사회에 대한 일갈은 아닌지 관객 입장에서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칼 같은 계산과 정확한 결과는 꽉 찼지만 윤리는 날로 기형이 되어 가고 철학은 하염없이 무너지는 시대. 별 수 없었던 것은 지훈 개인의 삶이었을까, 아니면 이 시대와 이 사회였을까. 이 질문의 답을 전자로만 몰아붙일 수 없기에 나는 지훈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별 수 없는 그가 너무나 이해가 되는 건 그의 삶이 한 소절고려가요처럼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러나 ‘별 수 없다’는 말만으로는 도망칠 수가 없다. 교무부장의 손에서 알반지를, 그 주춤거리는 손을, 그리고 교사 증명사진이 단정하게 놓인 앨범에서 자기를 위협하던 그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마냥 반가워할 수 없는 서로를, 서로는 앞으로 어떻게 직장 동료로 녹여 갈까. 지훈은 과연 교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훈은 착하지만 궁지에 몰려 있다. 인물의 상황과 성격이 대치를 이루는 반반의 자리에 정확히 내려놓는다. 딜레마를.


그리고 이 불친절한 영화는 끝끝내 관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않는다. 같은 동네 사는 현수, 샌드위치를 받아가면서 화색이 돌던, 엉엉 울면서 뛰어가던 그 아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뜨악한 전화를 받고 지훈은 보호자처럼 당연한 자세로 얼른 가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허름한 여인은 현수의 어머니였을까. 어쩌면 그 꼬깃한 돈은 현수가 콧노래 부르며 접은 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난다. 지훈의 딜레마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분명 선택을 했는데, 정의라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손에 넣은 어려운 선택이었는데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영화는 계몽적으로 선도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를 외쳐야죠! 하는 어조로 지훈을 혹은 관객을 다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식의 선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보여 주었다. 지훈의 동생을 다그치던 경찰관의 어조에서 우리는 이미 보았다. 조폭처럼 크고 어둡게 느껴졌던 협박의 그림자가 번듯한 수학 선생이라는 것에서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답은 보여주었지만, 그 답이 아니어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고요한 시선이 오히려 힐난처럼 마음에 박혀 오는 건 왜일까. 마지막에 변요한이 보여주는 지훈의 표정은 그야말로 미묘해서, 과연 그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별 수 없었던, 그래서 누구라도 이해할 만큼 지극히 무거운 현실을 살고 있었던 지훈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착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라 관객 입장에서 옹호하고 싶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선택 앞에 선뜻 ‘괜찮아, 잘했어’ 하고 어깨를 토닥여줄 수가 없다. 우리에겐 아직, 그럼에도 정의가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함을, 이 별 수 없는 시대에 별 수 없는 개인이 어쩌겠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다 해도 정의가 정답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 밤, 우리는 정의를 목격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목격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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