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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10. 2017

지금 여기 우리 같이

너희 안에 있는 정답

오늘의 이야기는 야무진 '정답 소년'들.

  아이들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들을 둘러싼 사람들도 알게 된다. 가까이에는 친한 학교 친구부터 멀리 세계 곳곳에서 아이들을 찾아왔던 시간을 잊지 못하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다른 누나 형들까지. 나를 포함해 아이들과 한때 함께 살다가 지금은 각자 다른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누나 형들이 많다.


  아직 내가 아이들과 살고 있던 시절 어느 날이었던가. 아이들이 고향을 떠나 처음 이곳에서 다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있었다는, 그래서 이름 대신 아이들이 "큰누나"라고 부르던 누나가 찾아오셨다. 수많은 누나들이 오고 가도 아이들에게 영원히 고유명사 "큰누나"일 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그 분을 나는 사진에서만 보았다. 집을 빌려 시멘트를 바르고 싹 청소하며 아이들 맞을 준비를 하는 사진, 처음 도착한 날 낯선 곳에서 잔뜩 굳은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찍은 사진에도 아이들과 같이 계셨다. 그 사이 여러 해가 지나 이제는 작은 아기를 안고 남편 분과 함께 오셨다. 학교 갈 꿈을 꾸던 아이들은 이제 진짜로 학교에 가서 집에 없었다. 그 사이 우리는 더듬더듬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아이들을 공통분모로 하는 사이였기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그 날 대문 문턱을 가장 먼저 들어섰던 아이가 큰누나를 보고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게 꿈은 아닐까 긴가민가하면서도 입이 절로 벌어지던 그 행복한 얼굴. 하나둘씩 들어온 아이들은 큰누나의 얼굴을 보며 답지 않게 수줍어하다가도 이내 환하게 웃었고, 큰누나의 아기를 신기해하면서도 어찌나 귀여워하는지 아이들이 아이를 귀여워하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고도 귀여웠다. (그 와중에 다른 누나들에게 누나들도 나중에 아이 낳으면 데리고 오라고, 자기들이 데리고 같이 축구를 할 거라고 말하며 눈썹을 까딱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짧게는 며칠이나 몇 주 정도 방문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신 분들도 종종 다시 찾아오셨다. 단기 봉사팀으로 오는 분들은 짧은 만큼 알차고 독특한 시간을 보내게 해 주어서 우리에게 참 반갑고 고마운 손님들이었다. 꼭 찾아올 상황이나 여건이 못 되는 분들도 꾸준히 SNS를 통해 연락을 해 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누구누구는 잘 지내요?' 하며 구체적으로 한 아이를 콕 집어 안부를 묻는 분들도 있었다. 각자가 아이 한 명 한 명과 나눈 소중한 기억 때문이겠지.


  오시는 분들마다 깜짝 놀랄 만큼 우리 아이들은 손님 맞이에 능숙하다. 워낙 손님이 많이 오는 집이다 보니 손님 맞이가 몸에 배기도 했고, 아이들 자체가 내뿜는 싱그러운 에너지가 있기도 하다. 단순히 겉치레에 탁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인사도 예쁘게 잘 하고, 자기소개를 할 때면 거침 없는 문장들을 줄줄 읊고, 헤어질 때 카드를 만들어 들려 보내는 일련의 과정에도 익숙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 아이들은 손님이 오시는 그 순간을 행복하게 즐기고 손님들에게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아이들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함께한 시간 동안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난 후에 곱씹어 보아도 오래오래 잔향이 느껴질 만큼 아이들이 올곧게 내보여준 애정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손님들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유독 좋아하는 외향적인 녀석이 있는가 하면, 성격이 워낙 내향적이라 덜 그런 녀석도 있다. "누구누구는 잘 지내요?"라는 연락을 받을 때 보통 들리는 이름들은 거의 순번이 있다. 아마 그만큼 첫인상이 강렬했던 것이리라. 24명의 이름과 얼굴을 한 번에 외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누구에게 물어도 이름을 아는 아이, 누구에게 물어도 인상 깊게 남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너무 그 아이들만 보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두루 애정을 표현해 주십사 손님들에게 언질을 해 둬야 했을 정도로, 그토록 초면부터 시선 강탈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K는 내게도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아있다. 사실 별 거 아닌 작은 기억인데, K가 보여준 그 순간의 표정을 잊을 수 없는 탓이다. 그 날 오후 간식은 비스킷이었는데 지금으로선 까마득하게 느껴질 만큼 아이들이 어릴 때여서 비스킷 종류별로 두 개씩 혹은 세 개씩 나누어 주었다. 한 그릇을 갖고 나눠 먹는 게 비교적 익숙한 한국과 달리, 인도는 자기 그릇을 이용하거나 큰 접시를 도르리하고 각자 먹는 편이다. 그래서 보통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바로 와서 간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개인 그릇을 세팅해둔 뒤 아이들을 불러 모으거나, 비스킷을 커다란 접시에 담아두면 거기서 정해진 양만큼 각자 손에 들고 가서 각자 먹거나 했다.


  그 날은 K가 과자 접시를 들고 아이들을 하나씩 따라다니며 간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마 단기 봉사 팀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았을 디디를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에게 과자를 다 돌리고 나서 손님인 우리에게도 왔고, 아이들이 가져가던 양만큼 우리도 두 개인지 세 개인지 비스킷을 집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때 K가 더 먹으라고 말했고, 나는 고맙지만 이거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 1단원에 나오는 회화 단문처럼 평범하고 간단한 대화였다. 당연히 그 영어 교과서에서처럼 K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 대화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K는 내 대답에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더 먹으라고 권했는데, 그 표정은 정말 진심으로 내가 더 먹었으면 하는 표정, 손님에게 더 잘 대접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왜 더 먹지 않고?" 하고 안타까워하는, 보통은 어머니 아버지 연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표정 말이다. 잠깐 집에 온 손님보다 눈 앞의 과자가 더 친숙할 법한 나이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그 진심 어린 호의를 더 거절할 수 없어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들며 고맙다고 웃었지만 사실 그 순간 속으로는 정말 놀랐다. 자기가 더 먹고 싶어 할 나이에 저렇게 능숙하게 손님을 챙기다니.


그 날의 K. 물론 내가 말하는 표정은 저 표정이 아니다. 저 표정은 카메라용 표정.


  그뿐이 아니었다. 손님에게 자기 집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뿐 아니라 인도라는 나라가 낯설다는 것까지 십분 배려해서 하는 행동이 이어졌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역지사지가 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다. 내 눈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상대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배려다. 자기에게 너무 익숙한 공간을 상대의 입장에 직접 서서 상대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는 일이란, 기껏 해야 열 살도 채 안 됐던 꼬마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3주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내가 다시 인도에 살러 갔을 때도 K는 놀라운 배려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걸, 우리가 공통으로 아는 상대가 있다는 걸,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있다는 걸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내가 그 집으로 첫 발짝을 떼고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잡아끌었다. 대화뿐 아니라 실제로도 내 손을 몇 번이나 붙잡아 끌고 다니곤 했다.

동물원 가던 날 설레는 아침

 

  내가 도착한 날이 하필 아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동물원을 간 날이었는데, 버스를 대절해 타고 가는 아침부터 모두가 잔뜩 들뜬 상황이었다. 그 신난 와중에도 K는 중간중간 내가 어디 있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는 있는지 살피며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장난을 걸어왔다. 이건 K가 나라는 사람에게 가진 애정의 크기가 아니라 새로 온 사람에 대한 배려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로는 처음 왔을 때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겨 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누가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시혜적으로 우쭐거리는 태도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게 K의 놀라운 점이었다.


  그런 K다 보니 크게 말썽을 일으킨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K가 여태까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사고는 학교 다녀오는 길에 길 가던 물소에게 받힌 일이었다. 그냥 책가방 메고 도시락 가방 들고 쫄래쫄래 걸어 집에 오는 평범한 길이었고, 소가 그 길을 같이 걸어 다니는 것 또한 일상의 풍경이었는데, 소가 갑자기 난리를 치면서 K를 들이받아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렸다고 했다. 다행히 목에 파스만 며칠 붙인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십년감수한 사건이었다. K도 그때는 많이 놀랐지만 파스를 붙여주며 달래자,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아예 내 방에 주저앉았다. 한국에 있는 누구 형한테 연락해서 자기가 다쳤다는 걸 이야기해 줘라 어째라 한참 지시사항을 늘어놓으시더니 이내 자기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의연했는지를 근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K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그런 귀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했던 기억이다.


  공부도 잘 하는 편이고 성격도 야무져서 '바른' 소년의 표본 같은 K지만, 지나치게 맑은 물엔 물고기 안 꼬인다고 때로는 그런 K의 반듯함이 주변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K와 같은 학년에는 절대 입을 다물지 않는 R, 툴툴대고 분노를 표현하던 당시의 H, 틈만 나면 장난거리를 찾아 웃고 떠들던 S 등이 모두 있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기를 원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 칭찬이나 보상을 받는 일을 너무나 좋아하던 K는 그런 분위기를 질색해했다.


그래서 반장도 자주 했다. 반장 배지를 달고 있는 K.

  숙제를 하려고 같은 학년 아이들끼리 다 같이 앉아 있다가 옆에서 몇 명이 사부작사부작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 K는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고 아이들에게 뭐라 뭐라 했다. 싸움이 나거나 누군가 말썽을 피울 때 누나 형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알려주는 것도 K였다.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고 원칙은 지켜야 하는 성격이어서, 자기가 가늠해둔 상황과 원칙을 벗어나게 되면 본인이 못 견뎌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그래서인지 목과 어깨를 움츠러뜨리는 틱도 발견되어 우리는 K가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야무지고 똑똑하다 한들 K 또한 아직은 야무지다는 단어보다 마냥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더 먼저 붙여주고 싶은 어린아이였으므로, 우리는 K가 성취의 기쁨만큼이나 휴식도 잘 누리기를 바랐다. 뭐 걱정할 필요도 없이 K는 계속해서 잘 해 주었지만.


  사실 또래 입장에서는 유난을 떨거나 고자질을 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들, 다른 친구들이 K를 이기적이라고 느끼거나 불편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K도 놀 때는 같이 어우러져 미친 듯이 잘 놀기도 했거니와, 같은 집 식구들이고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유대감이 우리를 똘똘 뭉치고 있어 크게 갈등을 빚거나 아이들과 사이가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R은 말이 많은 아이, S는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이듯 K는 그런 아이일 뿐이었다. 너는 그런 성격이고 나는 이런 성격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이였기에, 수학 숙제를 끌어안고 둘러앉아 있는 평범한 저녁이 만화책 일러스트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숙제가 많다고 짜증을 내던 H, K의 답을 슥슥 베꼈다가 걸려놓고도 별생각 없이 곧바로 또 베끼던 S, 그런 S를 보면서 까르르 웃고 "누나, 누나! S가 또 베꼈어!" 하며 재미있어 하던 R, 책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누나와 눈을 마주친 뒤 손가락으로 그들을 쿡쿡 가리키던 K.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광경이 그립다.


한 울타리 한 둥지 가족인 우리는 사이가 좋다.

  

  그 테이블에는 '정답 소년'이 한 명 더 앉아있는데, 바로 F다. K가 반듯반듯한 행동을 하고 정답을 맞혀 보상과 칭찬을 받는 걸 좋아한다면 F는 평소에는 장난꾸러기에 재미있는 것이라면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톰 소여 류의 소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재기 발랄한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따금 큰엄마나 큰아빠와 함께 다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때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어쩜 저렇게 옳은 말을 잘 골라내서 표현하지?' 싶을 만큼 곧고 빛나는 '정답'을 찾아내어 말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하려는 말의 의도가 잘 전달되도록 단어를 잘 고르는 편이기도 했지만, 잘잘못의 기준을 명확하게 갖고 있는 데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대화 상대의 의중을 잘 파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의 눈치를 설설 보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의견이 너무나 타당하고 신선하여 누나 형들도 말문이 막혀 네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을 정도이니 F는 정말 생각이 보통 번뜩이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F가 처음부터 얼마나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아이였는지. 처음 단기 봉사 팀으로 갔을 때 F는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불현듯 말했다. "2008년에 사람들이 와서 우리 집을 다 부쉈어."라고 이야기했다. 어린 나이에는 보통 '내가 세 살 때' 혹은 '내가 어렸을 때' 정도로 회상을 하지 않나? 물론 본인이 기억한 게 아니라 어른들의 말이 아이 입에서 나온 거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아이가 고작 서너 살밖에 되지 않았을 2008년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는 회상은, 뭔가 낯설고 어딘가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아마 아이가 나고 자란 배경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의 그림자가 그 해맑은 아이의 말에조차 어른거리면서 든 위화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F는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가 기억이 난다고?"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F는 진지했다. 일단 들어나 봐야겠다 하고 듣고 있는데 F는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님이 자기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서...로 시작된 이야기는 뮤지컬 <십계>나 영화 <이집트 왕자>에서도 나왔던 성경의 모세 이야기였다. 웬만한 애니메이션 영화는 섭렵한 상태였던 아이들이 <이집트 왕자> 영화를 보았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네가 헷갈린 거 아닐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F가 얼마나 진지하고 단호하던지. 나중에 나는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F가 진짜 그렇게 태어났는지 질문을 했고, 같이 간 팀원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만큼이나 F가 맛깔나게 이야기를 잘 엮어냈기 때문일 뿐. 그 후로도 F는 나를 (그리고 아마 다른 디디들도) 여러 번 그렇게 '낚았'는데, 반쯤은 속아주고 반쯤은 진짜 속았다. 나중에 '너 나한테 장난쳤지!'라고 물으면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곤 했다.



  어느 날은 F네 반을 맡고 있던 디디가 대뜸 'F가 천재인 것 같다'라고 했다. 그것도 음악 천재란다. 우리 집에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음악 천재까지? 자세히 물으니 아이가 엄청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열정이 있는데 그게 천재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바로 그 직전에 디디에게 멜로디언을 내려 달라고 해서는 지금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도 거기 앉아 멜로디언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긴 아이는 유난히 맑고 높은 목소리가 고와서 크리스마스 합창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조금 수줍어하면서도 맹렬히 연습하곤 했었다. 아이가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가 관심을 가진 것을 열심히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그런 아이를 보며 천재라고 눈을 빛내는 디디도, 그런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둬야 한다며 당장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 다른 디디도 사랑스러웠다.



  이야기도 잘 하고 악기 연주도 잘 했지만 그것들이 F를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되지는 않는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F는 그때그때 자기가 좋아하고 매진하는 일이 달라졌던 것 같다. 가장 안쪽 방의 벽장 안에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살던 불과 몇 달- 벽장까지 들어가 새끼 고양이를 어루만져도 어미 고양이는 F를 경계하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새끼 고양이를 어루만지던, 먼발치에서 어미 고양이 눈치만 보는 나에게 "누나 얘네 봐"하고 채근하던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던 얼굴. 그런가 하면 한때는 또 연날리기에 꽂혀서 연이 망가지도록 날리다 못해 신문지를 접어 연을 다시 만들기까지 했다.






  공교롭게도 K와 F 두 아이는 서류상 생일이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크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두 사람도 나란히 앉혀 생일 파티를 같이 했다. 우리 집의 생일 행사, 서로의 좋은 점을 말해주는 시간이 되면 생일이 같은 고로 둘은 서로에게 꼭 덕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참 이상하게도 내 안에는 이상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작은 아이로만 여겨졌는데... 덕담을 건넬 때 미소를 띤 진중한 표정, 덕담을 듣는 수줍은 표정으로 상대의 어깨를 툭 치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아이들이 달라 보였다. 일터에서나 축구 시합에서 하다못해 소년만화에서라도 본 표정이었다. 이미 성장한 남자들이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에 눈으로 건네는 묵직한 감정. 나는 그 순간 아이들이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 평생 서로를 울타리 삼아 살 수 있는 사이, 나중에 아이들의 삶에 다른 일이 찾아왔을 때도 저런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어깨를 툭 쳐 줄 수 있는 사이가 될 거라는 이상한 기대감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앞으로도 저렇게 훌륭할 것이다.


 항상 관심 가는 분야를 찾아 눈을 반짝거리던 F였으니, 앞으로 살면서 F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걷게 되어도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마저 힘이 날 만큼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성취의 기쁨과 노력의 가치를 아는 K가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 현실에는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답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다. 언제나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들을 향하고 지금 여기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정답을 알던 아이들이었다. 카르페 디엠, 부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아이들이길. 같은 목표를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디디가 먼발치에서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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