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Oct 29. 2017

편안해서 그래, 귀여워서 그래

사실은 사랑해서 그래

  24명의 서로 다른 아이들, 지금은 가족이 되어 버린 이 아이들은 그 이전에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각자의 집에서 살던 아이도 있고, 집을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던 아이도 있고, 부모님을 따라 밭일을 도우며 학교 근처에 못 가본 아이도 있고, 올리버 트위스트가 다녔을 것 같은 기숙학교에 적당히 들어가 손버릇 나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지내던 아이도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전부터 알던 이웃이나 친척, 심지어 형제들도 있다. 사촌을 제외하고 친형제만 이야기하면 총 3쌍의 형제가 있는데 각각의 성격이 다르고 개성이 뚜렷한 와중에도 그 집안을 관통하는 듯한 분위기가 묻어나와 보고 있으면 재미있고 귀엽다. 그중에서도 A와 X 형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유순하고 둥글둥글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던 몇몇 누나 형들의 소중한 노력 덕분에 아이들 사진이 가득 남아 있다. 방문하는 단기 봉사 팀이나 손님들도 우리 아이들 사진을 많이 찍어 주신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모두 자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많다. 그중에서도 사진이 가장 많은 사람을 꼽자면 X일 것이다.


  카메라를 슬슬 피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렌즈와 눈이 마주치면 생글생글 웃어줄 뿐만 아니라 사진 찍는 사람이 요구하는 포즈도 잘 잡아주는 좋은 모델이다. 같이 생활하는 누나 형들이야 NGO 통해서 후원해 주시는 분들께 보낼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24명이 골고루 찍히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는 편이지만, 며칠 짧게 방문하시는 분들이야 와서 찍어달라는 녀석들을 우선으로 찍게 된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다. 일단 24명이 엄청나게 많은 수는 아니어도 와서 끊임없이 말 걸고 멀리 갔다 또 와서 말 걸고 하기 때문에 사진 찍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카메라 피해다니는 녀석들까지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사진을 받으면 단연 X의 사진이 가장 많다.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 집 포토제닉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친구는 사진이 많다.


  계란 같이 빵실빵실한 볼에 씨익 웃음 짓는 그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눈가의 작은 흉터마저도 흉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이유가 된다. X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움 덩어리다.


  생긴 게 잘 생겨서만은 아니다. X는 걸어다니는 해피 바이러스였다. W와 R 형제가 유들유들하게 농담을 잘 하고 말을 많이 해서 유쾌하다면, A와 X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 편안한 행복함을 두르고 사는 아이들 같았다. 웬만한 일로는 이 아이들이 가진 안온한 분위기를 꺼뜨릴 수 없었다. 그림을 그려도 노래를 불러도 게임을 해도 간식을 먹어도 새 옷을 받아도 어지간한 일로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원래 크게 불평거리를 찾지 못하는 무던한 성격이라 그랬다.


  크게 사고 치는 일도 없고 누나 형들의 손길을 많이 요구하는 아이도 아니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한참을 같이 있었고 그 존재감이 뚜렷함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고 말하는 누나도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제법 오랜 시간 아이들과 함께 했고 내가 담당한 반 학생이기도 했는데, X를 혼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느낌만 있을 뿐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반 말썽꾸러기 녀석들이 수업 분위기를 망쳐 그걸 보고 웃다가 할 공부를 다 못한다든지, 종이와 색연필을 같이 쓰라고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다른 녀석들이 다 망쳐 버려서 피해를 본다든지 하는 일은 좀 있었지만.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X는 공부나 그림이나 무엇을 하든 혼자만 눈에 톡 튈 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건 없었지만, 그 무난함이 이 아이의 강점이다. 그림을 그리면 손이 느리고, 공부를 하면 외우는 게 느리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외운 것들을 되새겨 보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꼼꼼하게 색연필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 이건 정말 아이에게서 배울 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직한 면이 있는 아이다보니 유순하고 순둥이 같아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의외의 고집과 뚝심도 은근히 숨어 있었다. 지내다 보면 알게 되는 그 고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오곤 했다. 한동안 같이 지내던 누나가 밤마다 아이들이 베갯머리에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도 요구하니까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짧은 걸로 하나씩 보여주던 시절이 있었다. 자야 할 시간에 옹기종기 방마다 모여서, 같은 방 쓰는 아이들이 다 누우면 누나를 부르는 게 일이었는데 그 날따라 X가 어디 있었는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원성과 시간 규칙에 따라 그 누나는 X 없이 동영상을 틀어 주었고, X는 나중에 다시 보여주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거실 한가운데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서는 잘 그치지도 않았다. 더한 것도 잘 참아 넘기던 녀석이 이게 뭐라고 그렇게 울 일인가 싶어 다들 얼마나 귀여워하며 웃음을 참았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 아이는 상대가 누나 형들이든, 큰엄마 큰아빠든, 친구들 동생들이든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일이라고는 좀처럼 없다.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 줄 알고,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있기만 해도 보는 사람이 미소 짓게 만드는 이 사랑스러움 덩어리는 지금도 즐겁고 유쾌하게 쑥쑥 자라고 있다. 어릴 때처럼 마냥 귀엽다기보다는 이제 키도 쑥 자라고 목소리도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X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영원한 사랑둥이겠지. X의 타고난 성정과 꾸준하고 예쁜 성장을 기쁘게 지켜볼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앞으로 살면서 만나는 누구에게든 우리 X가 여전히 그런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처럼 투샷을 잡기 힘든 그의 형 A가 있다.


  A와 X는 아들만 다섯인 집에서 나란히 둘째, 셋째 아들이다. 타지로 와서 낯선 생활을 하게 됐건만 둘은 서로를 대놓고 의지한다든지 하는 구석이 전혀 없다. 마음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남보다도 더 데면데면할 정도다. 딱히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닌데 둘이 붙어 있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형제라고 따로 신경을 써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G의 뒤꽁무니를 붙잡고 잔소리를 하거나 옷 개는 것까지 챙겨줘야 했던 U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의아할 정도여서 집 밖에서 걷다가 둘이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슥 지나쳐 가서, 그  모습을 보던 내가 어이 없어 헛웃음을 웃게 만들 정도다.



  둘이서는 한 집에 살아도 그렇게 남인 듯 아닌 듯 지내기에 원래 성격들이 무던해서 그런다 보다 했는데... 고향에서 막냇동생이 찾아왔을 때는 둘 다 동생을 어찌나 살뜰하게 챙기는지.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는 X는 동생을 안았다가 업었다가 하며 동생 발이 땅에 닿을 틈을 주지 않았고, A는 밥 먹는 내내 등 뒤에서 꼼지락거리다가 A의 목에 매달렸다가 난리를 피우는 동생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허허웃으면서 즐거워했다. 늦둥이 본 아버님들 얼굴에서나 보일 법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라니... 터울이 얼마 지지 않는데다가 매일 보는 형제보다는 아무래도 멀리 살면서 자주 보지도 못하는 막둥이가 더 눈에 밟히는 마음이겠지 싶어 보면서 나도 흐뭇하게 따라 웃게 되었다.


  같이 살던 시절도 지금 뒤져보는 사진에서도 투샷 찾기는 쉽지 않지만, 둘이 형제라는 사실을 묶어주는 특징은 또 있다. A도 X만큼이나 매사에 편안하고 차분한 편이며, 멍하니 있는 모습조차 귀엽다는 것이 같았다. (멍하니 있을 때의 표정도 너무나 비슷하다.) A는 눈썹 끝이 아래로 뚝 떨어져 있는 모양이어서 더 그런 인상인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장난기가 눈에서 별똥별처럼 타닥타닥 튀고 있는 X와는 달리, A의 눈빛은 언제나 차분하고 다정했다. 성격을 보면 장난기가 없는 편이 아닌데도 눈빛은 늘 그랬다. 마주보고 생긋 웃기만 해도 마음에 편안함이 사르르 몰려오는 표정. 그래서 A와 인사 한 마디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또 멍하니 무슨 생각 하고 있었을까.


  카메라에 알레르기 반응 보이지 않는 것도 형제가 똑같아서 A도 사진이 꽤 많다. 게다가 셀카 찍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나 형들 핸드폰 내려놓으면 가져가서 자기 셀카를 찍어 놓아 핸드폰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구도의 셀카가 몇십 장씩은 족히 있었다.



  이렇게 밝고 편안한 A지만 처음 왔을 때는 자기를 내려놓고 멀어져 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면서 마당을 구를 듯이 엉엉 울었다고 한다. A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모습을 막연하게 상상으로만 그려 볼 뿐이다. 그러던 녀석이 이제는 다 커서 나보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낮게 내려앉았건만 그 다정한 눈빛만은 그대로 반갑게 인사를 해 온다. 그리고 돌아서면 내 핸드폰에 여전히 똑같은 구도의 셀카가 새로 남아 있어 또 웃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많은 것들이 달라져 간다. 그 사이 우리는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짐을 쌌다 풀었다 했고, 그러는 동안 아끼던 곰돌이 푸 책이라든지 어릴 때 쓰던 색종이 같은 것들이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다. 함께 농담을 나누던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같이 살던 이들이 이제는 따로 살기도 하며 나보다 작던 아이들이 쑥 나보다 커지기도 했다. 많은 게 변했다. A와 X도 많이 자랐고 이제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그 모습은 다시 아이들과 만나 함께 산다 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페이지에 소중하게 박제된 기억일 뿐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편안하고 다정한 아이들의 눈빛, 어떤 일이 있어도 무난하게 넘어가는 힘, 그게 귀여워서 괜히 한 번 더 건드려 보는 누나 형들의 애정,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삐쭉거리는 모습과 그것조차 귀여워 몰래 헛기침하며 삼키는 웃음. 그 안에서 서로 넘실거리는 애정 같은 것들. 한 집에서 눈 닿는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서로 돌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한 우애 같은 것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사는 집은 언젠가 선물 받은 인형들처럼 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왔지만 나란히 있으면 보기 좋다. 그리고 그 가운데 A와 X의 강물 같은 편안함이 있다. 한 번 더 놀리는 것도, 한 번 더 눈 마주치는 것도, 한 번 더 손 맞잡는 것도 사실 다 편안해서 그렇고 귀여워서 그렇다. 사랑해서 그렇다.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 24명의 삶은 계속 달라져 갈 것이다. 이미 학교를 다니면서 집에만 살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듯 앞으로도 꾸준히 그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각자 갈 길을 가는 날도 오겠지. 그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저 지금 함께인 이 시간에 감사하며 계속 사랑할 뿐이다. 상투적 노래 가사지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의 눈빛 손짓 말 한 마디가, 이런 사소한 글에조차 하나하나 적기 어려운 크고 작은 사랑의 흔적들이 언젠가 우리 혼자인 듯 걸어갈 길에서 회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를 기도할 뿐이다. 우리 마음을 가만히 밝혀 주는 작은 화로가 되어주기를.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을 모아 놓은 사진만 봐도 눈물 날 듯 뭉클해지는 내 주책 맞은 마음만큼은, A와 X의 부드러운 미소만큼이나 변치를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여기 우리 같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