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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02. 2017

변화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알 수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빨간 머리 앤이 아직 어렸을 적, 앤은 자기가 말할 때마다 어른들이 웃는다며 기분 나빠했다. 어른들 입장에선 앤이 책에서 읽은 거창한 단어를 일상 용어로 쓸 때 그 위화감이 귀여워 웃는 것이었지만. 앤은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의 생각을 절대 비웃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앤을 읽으며, 이따금씩 어른들이 귀여워한답시고 하는 말에 얼굴을 붉히던 어린 날의 나도 생각했다. 어린 날의 나를 나이테처럼 꼭꼭 새겨 두고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지금은 그런 다짐조차 휘발되어 갈 만큼 많이 달라져 왔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어땠더라 돌아봐야 했던 때가 많았다. 24명의 아이들의 다양한 면면을 매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아이들도 나를 잘 알게 되고 나도 아이들을 잘 알게 되어, 서로 안에서 비슷한 점을 보는 날도 있었고 전혀 다른 면을 보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어땠더라, 하고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곰곰이 생각하며 톺아봐야 했던 건 역시나 사춘기였다.




  사춘기란... 뭘까. 중고등학교 때 기술 가정 교과서에서 뭐라고 정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10년쯤 지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검색해 볼 수도 있고 관련 논문을 찾아보며 사춘기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사춘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지 오래인 지금에나 유유자적 드는 생각일 뿐. 아이들의 사춘기와 맞부딪힌 그 순간은 그런 생각까지 할 여유도 없었다. 정말이지 하루하루 고장 난 범퍼 카를 탄 기분이었다.


  내 사춘기는 어땠더라. 나는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새벽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훌쩍거리며 센티한 영화를 보기도 하고, 하염없이 편지며 일기를 줄줄 적어내렸던 기억이 난다. 마음 맞는 친구와 밤늦게까지 문자를 주고받으며 별스럽지 않은 날의 별스러운 생각들을 주고받고 서로의 사춘기를 끌어안아 주었던 것도 생각난다.


  한 마디로 내 사춘기는 지극히 내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까칠한 성격과 별개로 그 시기에 유독 고드름처럼 거꾸로 자라나던 예민함이 있기도 했다. 그런 고드름이 가끔 툭 떨어지면 엉엉 울며 엄마랑 싸우기도 했다. 크게 사고 치고 싶은 마음도, 칠 배짱도 없는 성격이기도 했다. 집에서는 엄마와 싸우고 이불을 뒤집어쓸지언정 밖에서는 무난하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다.


  그런 내게 J의 사춘기는 너무나 낯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J는 아이들 사이에서 리더였다. 자기가 리더인데 아이들이 말을 잘 따라주지 않을 때 힘들다는 말, 일찍 데뷔한 아이돌 리더가 토크쇼에서 눈물 찍어내며 할 것 같은 그 말을 J는 10살 무렵에 이미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도 멋있는 것도 좋아해서 아이들이 잘 따르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서워하는 형이기도 했다. 세 명의 큰형들이 든든하게 아이들을 받아주는 편이었다면 J는 군기반장 역할을 할 때는 하는 형으로 자라났다.


처음 만났던 시절, 2012년 12월의 J. 이미 리더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었다.
야무진 성격에 뭐든 적극적으로 잘 하는 편이었고,
항상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친구이기도 했다.
동생들이 그 카리스마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든든한 형으로 자라났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큰형'이 3명이었는데 언제부턴가 J도 큰형으로 굳어졌다. 4명만 학년이 같아지면서 더욱 그렇게 됐다. 자연스럽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J는 성격이 강하고 다부진 면이 있었다. 자기가 납득하면 금세 수긍하는 합리적인 고집이었지만 아무튼 순하기만 한 성격은 아니었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 우리가 알고 있으며 사랑하는 J의 성향이었다.



  꿈에 그리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집을 이사하면서 전처럼 아이들이 집안사람들의 영향만 받을 수 없는 건 당연했지만, J의 사춘기는 그게 유독 불안했다. J의 사춘기는 고집과 함께 왔다. 꼬마들처럼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아닌데 같이 있는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싫어!"로 후드려 맞는 느낌이랄까. 어쩌다 어딜 가느라고 버스를 같이 타게 되는 날이면 외국인에게 꽂히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부담스러워하며 저기 멀리에 서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서늘한 눈빛을 하고 반항적으로 입을 꾹 다물 때도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J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어 J를 생각하면 내버려 두고 싶은 때에도 동생들 때문에 훈육의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게 나도 힘들었지만 J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방을 쓰는 누나들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사춘기를 돌아보며 엄마에게 잘 하지 못했던 시간을 뒤늦게 후회하고 반성했다. 그렇다 한들 뾰족하게 이 시기를 잘 보낼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각자의 사춘기라고 해봤자 큰 사건 사고 없이 유하게 살아온 누나들이었고, 사춘기 아이는커녕 갓난아이도 키워보지 않은 누나들이었다. J가 사춘기를 맞아 티격태격 삶과 주먹질할 때, 우리도 각각 인생에 처음 맞는 이 시기에게 훅을 날리기도 얻어맞기도 하고 있었다.



  하필 우리 집에 같이 사는 형도 얼마 없을 때였다. 그래도 형의 존재감이 톡톡했다. 누나들이 발 동동 구를 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정시켜 줄 때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주머니에서 담배 같은 게 나오지는 않을지 예의 주시할 때도 있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한때 방황도 해 본 형의 말이라 더욱 든든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삐딱선을 타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친구의 추측이 거의 맞았다. 설령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해도 그 친구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받아들이는 신뢰도 생겼다.


  그래도 늘 쉽지만은 않았다.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좋게 말하면 다정하고 나쁘게 말하면 끌려다니기 쉬운 성격의 Y가 배 아프다고 끙끙거리던 며칠이었다. 학교도 가지 못했다. 정밀 검사한다고 병원 드나드느라 데리고 다닌 형도 고생했고 돈도 많이 깨졌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Y의 꾀병을 의심했던 우리는 Y와 살살 대화하면서 이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이내 혹시라도 J가 Y를 때려서 아픈 게 아닌가 하는 가설로 이어졌다. Y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형제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당시 그런 생각을 하는 마음은 그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엄석대 되는 것 아니냐며 걱정을 했다. 당시 J와 일대일로 대화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성격도 원칙적인 데다가 당시 집에 가장 오래 있던 누나, 막내 반을 맡은 누나였기 때문에 다소 딱딱한 지시를 내려야 할 때가 많았다. 이건 하면 안 돼, 이건 해야 해, 같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게 나라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내 역할이 그랬고, 그랬다간 J가 타고 있던 삐딱선을 타고 아예 튕겨나갈 것만 같아 J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J와 대화를 나누고 J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 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J네 반 누나는 펄(Pearl) 디디였다. 내가 처음 갔을 때도 이것저것 다 설명해 주며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던 펄 디디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정리해서 누구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는 재구성을 하는 사람이었다. 펄 디디는 이번 일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Y와도, J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혜롭고 사려 깊게 사건 전모를 정리해 주었다.


  J가 때린 건 사실인데, Y를 노리고 때린 게 아니라 움직이다가 잘못해서 맞은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무엇 때문에 디디들이 긴장하는지 알기 때문에 말하기 싫어 꼼질거린 것이었다. 며칠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이 있을 때마다 배후에 J의 그림자가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매번 긴장했다. J의 카리스마 있고 듬직한 성격이, 반항적 눈빛 아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이 강하기 때문에 훌륭하게 자랄 수도 있지만 엄석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모든 성향은 그 자체로 나쁠 것이 없지만 어떻게 자라는지가 중요할 테니까.



  당시 갈팡질팡하던 우리에게 큰엄마가 주신 조언은, "싸움 거리를 골라내라"는 것이었다. 그냥 넘길 일과 붙들고 넘어가야 할 일을 구별하는 것. 나름대로는 애썼지만 방정식처럼 대입해서 답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변화무쌍한 사춘기 소년과 초보 양육자 사이에서 그 조언대로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저번에는 붙들어야 했던 일이 이번에는 붙들면 안 되는 일이 되어 있을 때도 있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이 뒤늦게 후폭풍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조언은 문자 그대로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도움이 되었지만 아직 내 것으로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날들은 계속되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큰엄마가 나서 주시기 때문에 아이는 괜찮겠지만 어떻든 작게라도 나쁜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서툶이 혹여나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되지 않길 바라며 늘 고민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펄 디디에게 뜻밖의 카톡을 받았다.


"언니, 물어봤는데 J가 써니 디디가 단호할 땐 단호했는데 그게 좋았다고... 보고 싶다 했대. 감동적이지 않아? 난 감동 받음. 다른 애도 아니고 J가."


  감동적이다 못해 뭉클했다. 내 단호함은 J의 강인하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과 맞부딪힐 씨앗 같은 거였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면은 아니었다. 오래 알았으니 데면데면하진 않더라도 한창 사춘기로 속 시끄러웠을 J에게 나는 한 걸음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J는 내 그런 면을 그냥 그대로 좋았다고, 보고 싶다고 말해 주었다. 그걸 소중하게 전해준 펄 디디에게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제 몇 년이 흐른 지금은... 한창 눈빛에 반항기가 서려 있던 당시에 비하면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다. 속 얘기도 터놓고, 더 어렸던 날들처럼 귀엽게 생긋 웃기도 한다.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신이 나서 누나의 연애담을 묻기도 하고, 그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싶어서 자리를 뜨는 나를 억지로 주저앉히며 또 웃기도 한다. 같이 버스를 타느라 옆에 서 있는 J에게 버스 오는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저 안쪽에 서 있어도 된다 말했다. 그랬더니 J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싫었는데 지금은 정말 괜찮다고.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지금은 괜찮다는 말보다 그때는 싫었다는 말이 더 좋았다. 솔직하게 과거를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그때의 감정을 말해도 괜찮을 만큼 우리는 신뢰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니.




 

 

 오랜만에 만난 J와 둘이 길을 걷다가 꽃을 보았다. 다음 꽃 검색을 이용해 좋아하는 꽃 이름을 몽땅 찾아보고 다니다 알게 된, 란타나. 저렇게 작고 귀여운데 독성이 있는 꽃이라고 말하니 J가 깜짝 놀라며 맹독이냐고 물었다. 거기까지는 몰랐던 내가 우물쭈물하자, J는 저 꽃의 잎을 시골 사람들이 빤(pan)처럼 씹기도 한다고 말해 주었다. 빤은 잎사귀에 향신료 등을 돌돌 말아 씹는 일종의 기호식품인데, 약한 마취성도 있고 사회적으로는 한국의 담배랑 비슷하게 인식된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란타나의 독성이 빤처럼 기능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J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온 거라면 괜찮은 부위의 괜찮은 양만 쓰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거라서, 그걸로 죽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그냥 한 줄 읽은 지식일 뿐이고, 때로는 경험으로 아는 지식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산 식물에 대해 아는 지식은 정말이지 깊고 방대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넘어갔다. 자연은 광활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적다. 최선을 다해 배우고 관찰하며 알아 가겠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모른다. 당시엔 그러다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서는 우리 삶도 그러하리란 생각이 든다.



 사춘기는 뭘까. 내 때도 몰랐고 J 때도 모르는 채로 허우적대다 지나간 기분이다. 혹시 내가 나중에 엄마가 된다 해도 내 아이의 사춘기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영역, 허우적대다 지나가는 어떤 시간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사춘기를 겪는 자녀를 대여섯쯤 키워낸 이들도 새로운 사춘기에 대해 말하기 어렵겠지. 경험으로 아는 지식은 방대하지만, 모르는 영역은 그보다 더 광활하니까.


  어쩌면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그런 서로 옆에서 그냥 걷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저녁의 톤으로 J의 이름을 부르던 펄 디디의 목소리, 그냥 딱히 뭘 해주지 않아도 J를 J로 이해하고 있던 형이 한 집에 있다는 사실, J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르는 다른 누나 형 동생 큰엄마 큰아빠... 어차피 J의 인생은 J가 사는 것, 사춘기도 결국은 J가 걸어가야 할 길이니 옆에서 너무 발 동동 구를 필요도 애초에 없었다는 걸, 아이를 무균지대에서 기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내가 그만큼이나 서툴다는 걸 그때도 지금도 본다.


  J와 함께 본 꽃 란타나는 자라면서 꽃잎 색깔이 변해 칠변화(七變花)라고도 불린다 한다. 사람이나 꽃이나 시시각각 달라져 간다. 사춘기를 일단락하고 또 선한 눈으로 웃고 있는 J가 언제 또 다른 모습을 보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란타나의 색이 변해도 란타나이듯, J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J는 우리가 사랑하는 J다. 점점 모르는 면이 많아져갈 J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그 옆에서 또 같이 걸으며 산책할 수 있다면, 삶에 찾아오는 굴곡과 감정에 대해 또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마냥 좋기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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