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들려온다
처음 만났을 때는 24명이 얼굴도 다 비슷해 보이고 이름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눈에 금방 익을 수밖에 없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맨송맨송한 민머리에, 그 곳곳에 터진 상처가 나서 약을 바르고 있던 작은 아이. 두 번째로 막내라는 그 아이는 배가 볼록했고 진중한 눈빛으로 뒷짐을 지고 걸어 다녔다. 딴딴해 보이는 몸이어도 덩치가 제일 작은데, 표정이나 자세는 금방이라도 농사의 풍흉을 논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장님 분위기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엉클(아저씨)'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성격이 어떤지보다, 아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보다, 아이가 어디가 아픈지를 먼저 알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처음 만나기 얼마 전 아이는 한 번 쓰러졌다 했다. 현지인 스태프가 엉엉 울면서 연락을 했다고, 다 같이 놀라 병원으로 갔다고 들었다. 아이가 얼굴색이 변해서는 빳빳하게 쓰러지는데 금방이라도 죽는 줄 알았다고, 다들 얼마나 놀라고 긴장했는지 모른다고 들었다. 모두 똑같은 커리나 렌틸콩 요리를 먹을 때에도 아이는 하얀 커드에 밥을 말아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아플 때 흰죽을 먹듯 아픈 사람들이 많이들 그렇게 먹는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처음에는 간이 좋지 않다고만 들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남자아이들끼리 아무리 편하게 놀더라도 배를 툭 치거나 하면 안 된다고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유리구슬처럼 조심스레 앉아만 있기엔 너무나도 보통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혼자 먼 산 보는 어르신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해맑게 웃고 간식을 먹고- 아이가 아프다는 걸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큼 아이는 늘 밝았다.
아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싸리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뒷모습이다. 얼마나 야무지게 청소를 잘 하는지, 게다가 그 과정을 얼마나 즐기는지. 어느 날이었던가, 비가 오지 않는 시즌인 건기였다. 갑작스럽게 밤새 폭우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쳐서 물난리가 난 아침, 겨울옷이 덜 필요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급히 집에 있는 겨울옷(이라고 해도 긴팔 후드티나 카디건 정도지만) 몽땅 뒤져 서로서로에게 껴입혔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기둥으로 거리가 엉망에, 방에 물이 새고, 전기 장치가 번개를 맞아 언제 정전이 끝날지 모른다는 소식에, 마치 어제와는 딴판의 세상이 된 그 아침에도 아이는 마치 태초부터 그러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마당을 싹싹 쓸어나갔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이와 같이 마당을 쓸던 그 시간이, 그 작고 일상적인 일이 뭐라고 내게는 참 안정적이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아이가 아프다는 걸 잊어버릴 만하면 아이는 한 번씩 병원 신세를 졌다. 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기도 했지만 한 번씩 아이는 정말 어린 동물처럼 연약해져 앓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작은 아이의 몸이, 어쩌면 자기 자신도 모를 만큼 평소 얼마나 열심히 애쓰고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한 번은 무척 아프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큰아빠와 다 같이 뛰어노는 날이었다. 큰아빠 큰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뭘 하든 뭘 먹든 마냥 좋아하기도 하고, 큰아빠 큰엄마가 아이들과 같이 놀거리 먹을거리를 워낙 살뜰히 준비하시기도 해서 아이들에겐 늘 행복하게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 날은 다 같이 출발선과 반환점을 잡아놓고 달리기 시합을 하는 날이었다. 꼴찌를 해도 기분이 좋은 "큰아빠 배 달리기 시합"인데, 병원을 갓 벗어난 D는 뛸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D에게 큰아빠는 긴 막대기를 주시면서 출발선에서 카운트를 하라고 하셨다. 작은 D가 그때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평소의 D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우리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고 있는지를 확 느낄 수 있는 표정이었다.
D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아이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세상 가장 해맑은 웃음을 지을 때면 영락없이 나이가 드러났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훌륭한 목청으로 노래를 곧잘 불렀다. 좀 '뽕삘'이 많이 들어간 구성진 가락이지만... 그래서 노래를 굉장히 잘 하는데도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왔지만, 아무튼 좋았다. 멍하니 있을 때면 습관적으로 책상이든 벽이든 퉁퉁 젬베 치듯 두드리는데 그 장단이 또 무척 구성졌다. 신토불이의 향기를 풍기는 어린이... 그 모습이 귀여워 모두들 D를 예뻐했다. 한참 큰 형아들이 D를 아저씨라고 툭툭 부를 때 눈에 얼마나 깊은 애정이 배어 있는지 몰랐다. 그런 D는 어딜 가든 많이 사랑받고 큰 테가 났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심지가 굳었다. 자기 주관이 확실했고 어린 나이에 어디도 쉽게 끌려다니지 않는 면이 있었다. 때로는 고집스럽기도 하고 막무가내일 때도 있었지만, 작아도 바윗덩이 같은 (비유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몸도 바윗덩이 같이 딴딴하고 무거워 더 야무진 인상을 주는) D가 한 번씩 아프면 세상 가장 여린 동물처럼 끙끙대는 것이 안쓰러웠다. 간이 안 좋다고만 알다가 나중에는 병명도 들었다. 겸상 적혈구 빈혈증. 원반 모양이어야 할 적혈구가 낫 모양이 된다고 중학교 교과서에서나 보고 잊어버렸던 병명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가 남들보다 많이 약하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본인의 마음이 야무지고 단단해도.
그래서 우리 모두 D의 건강 문제라면 항상 민첩하게 반응했다. D가 나고자란 산골은 음식에 고춧가루를 거의 넣지 않는 반면, 우리가 사는 지역은 고춧가루를 더 써서 상대적으로 맵고 짜게 음식을 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아이를 배려한다 해도 단체로 굴러가는 학교와 집의 생활 또한 아이에게 벅차 보였다. 아이의 건강 문제라면 언제나 섬세하게 반응하시는 큰엄마의 눈에 그런 차이가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아이 부모님과 상담 끝에 아이는 1년만 고향에 돌아가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서 무리하지 않는 생활을 하기로 했다. D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고 '히힛' 하고 웃는 그 얼굴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 너무나 서운했지만, 우리의 서운함보다는 아이의 건강이 중요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1년 동안 잘 쉬고 다시 우리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온전히 건강해진 것은 아니다. 그 후로도 아이는 한 번씩 병원 신세를 졌고, 그때마다 먼 곳에서도 우리는 그저 착잡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보았다. 병원 침대에 힘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가장 최근에 입원했을 때는 무려 헤모글로빈 수치가 2.9라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아이는 몸이 조금 나아지자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의사 선생님이나 멀리서 걱정하는 누나 형들에게 고맙다는 카드를 쓰고, 병동의 다른 아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다녔다. 오랜 기간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지친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이 정말 행복해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도 너무나 행복했다. 배워서 남 주는 공부를 하고 이웃을 아끼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자고, 아이는 우리가 늘 큰아빠 큰엄마에게 듣고 또 서로에게 입내 내어 말하던 대로 살고 있었다.
문득 아이 앞에 오늘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람은 현재가 변변치 않을 때 빛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한다는데, 내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덜컥 나던 시기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로 아직 이 자리에 굳건한 마음으로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치열하게 하루를 살고 쓴 일기와 요즘의 내 일기는 농도부터 다르다. 혹시 내가 현재를 내팽개쳐 두고 과거만 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합리화하고 있는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그냥 오늘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려보내며 어제만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두려워질 때, 퇴원한 아이가 큰아빠와 형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받았다. 기타로 조곤조곤 음을 잡으며 아이와 눈길을 마주치는 큰아빠와 형, 그리고 맑고 높은 소리로 아이가 부르는 노래가 나를 씻어주는 기분이었다. 아픔을 어느 정도 떨쳐낸 날 아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노랫말과 상관없이 그냥 그 자체로 희망이고 위로였다.
이전에도 쓴 적 있지만, 오래전 사랑니를 빼고 끙끙 앓는 나를 보며 자기도 요즘 이가 나는데 사랑니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아이가 바로 D였다. 그 바로 전 주에 과학 교과서에 나온 앞니, 어금니, 송곳니, 사랑니 따위를 달달 외운 차였다. 얘야 너한테 나는 건 어금니란다.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개수까지 세어 가며 확인시켰다. 지난주에 배운 내용의 복습 차원이기도 했지만 굳이 내 입까지 벌린 건, 내가 어릴 때 그건 어금니라고 웃으며 이야기해 주시던 엄마 말씀을 듣고도 '그래도 사실은 이게 사랑니면 어떡하지?' 하고 안심이 되지 않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 모두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선 사람의 등을 보며 사는 것 같다고, 그러니 더 등을 곧게 펴고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기억을 다시 돌아보니 아이가 내 등을 보는 동시에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가 부르는 힘차고 맑은 노래를, 아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는 일이 쉽지 않을 법도 한데 아침저녁으로 내가 부르기도 전에 찾아와 씩 웃으며 "디디! 약 줘!" 하고 손을 내밀던 D의 목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한번 허리를 곧게 펴고 어깨에 힘을 뺀다. 호흡을 가다듬고 발 끝과 이어지는 길을 본다.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듯 걷는다. 나의 오늘에는 아이의 목소리가 드리워져 있다. 내가 여기서 D의 노랫소리를 듣듯-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때 꼿꼿한 등을 보여줄 수 있도록. 부디 그 날까지 늘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늘을 살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좋은 영향력이 계속 향기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