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선희 Jun 01. 2022

결론은 아직이니까

작별의 노래

텅 빈 사무실에서 심심해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며칠 전에 쓰다 만 일기를 완성하기로 했다.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생각은 사실이 아니고 그저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너무 강력하게 모든 것에 실패자가 된 기분이다.’로 시작하는 일기.


그날 나는 개차반이 되기 위해 공원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불현듯 저런 생각이 들어서 흠칫 놀랐다. 그건 마치 작년의 어느 날, 구청에 남편의 사고 신고를 하려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불행’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을 때와 같다. 다른 점은 작년의 나는 불행이라는 단어에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 끝은 그런 게 끝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이번엔 어땠나. 실패라는 단어는 걸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부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공원까지 걸어가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실패인가, 실패야? 내 인생은 실패한 건가? 실패라고 할 수 있나? 그래서 만약 실패라면 어떤데? 실패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가? 그럼 뭐가 중요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를 하나 사들고 걸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으면 어쩌지 그런 사소한 걱정도 하며 걸어갔다. '실패'라는 글자에 구멍이 날 정도로 골똘히 생각하며 자주 앉는 벤치까지 걸었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벤치 중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얼른 앉았다.

바람 부는 야외에서 마시는 맥주는 늘 충만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탁 트인 공원을 한번 둘러보는데 높은 아파트 사이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앞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이 터져나왔다. 가방에 넣었던 맥주 캔을 꺼내 딸칵, 따서 몇 모금 마시는데 참 다행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이 평화로워 보여서 다행, 해가 길어서 다행, 바람이 불어서 다행, 맥주가 시원해서 다행. 다행인 것들이 많아서 다행. 실패고 나발이고 그냥 바람이 불어서 좋았다. 눈을 감으면 더 좋았다. 눈을 감으면 바람이 더 결정적으로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마도 살아갈 날이 너무 많이 남았고 만약 실패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이고 여기서 끝이 아니니까 그렇대도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실패라는 생각에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요즘의 나는 반복해서 반복해서 인생은 통과해 가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좋았다.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2019. 6

매거진의 이전글 빛도 그늘도 나답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