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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un 19. 2022

사랑이 이렇게 이어진다

까슬까슬한 이불을 덮은 지호의 다리를 주무르다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자려고 불을 껐는데 지호가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어둠 속에 앉아 지호의 다리를 꾹꾹 주무르는데 언젠가 지금과 꼭 같은 밤을 보낸 기억이 났다. 그때는 내가 지호처럼 누워 있었고 할머니가 내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지. 오늘로 이틀, 다리를 주무를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 손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등을 천천히 문지르기만 해도 다리를 살살 주무르기만 해도 스르륵 긴장이 풀어졌다. 정다웠던 그때, 잠이 솔솔 왔었다. 깜박 잠들었다가도 내가 눈을 반쯤 뜨고 “할머니.”하고 부르면 할머니는 불경을 외다가도 멈추고  “어여 자.” 대답하며 다리를 몇 번 쓸어주었다. 이제 잠이 들었나 싶을 때쯤 지호도 “엄마.”하고 부른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처럼 손을 멈추지 않고 “응, 자자.”하고 어른다.

할머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같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안다. 없었던 일인 듯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어둠 속에 앉아 보드라운 지호의 다리를 만지고 나니 그때의 할머니를 알 것 같다. 달빛이나 가로등 불빛만 겨우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할머니도 나처럼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곤 했겠지. 오늘의 일이라든지 내일의 근심, 사소하거나 오래된 걱정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겠지. 눈을 감고 주무르다 잠이 스르륵 찾아와 노곤해지기도 했겠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정하게

잘 자렴,

잘 자렴,

잘 자렴.

그런 마음이었겠지.

할머니 사진을 보면 지금도 ‘선희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렸던 내가 꿈도 없이 달게   있었던  할머니 때문이었나. 할머니가  주위에 둘러둔 사랑 때문이었나. 그때  다리도 지금 지호의 다리처럼 보드라웠을까. 그래서 할머니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채워줬을까. 지호가 잠들고 나서도 조금  다리를 주무르다 보니 할머니도 그랬을  같아 나도 모르게  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몰랐던 마음을 깨닫고 오래 곱씹는다. 열어둔 창으로 여름밤의 빛이 넘어 들어오는 방에 앉아 나는 오래 전의 할머니가 건네 준 사랑을 받는다. 어둠 속에서 흔들흔들,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내 다리를 주물러주던 할머니의 실루엣에 내 모습을 겹쳐놓는다. 사랑이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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