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말고 늦여름

by 박선희

사는 게 뭔지 알 것 같다가도 도통 모르겠는 일이 반복이다. 원래가 그런 건가 생각하면 안심이 되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면 되는 것인가 생각하면 시시하다.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라는 게 또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라서 어느날은 보행신호가 빨간불인 십자횡단보도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려 오도가도 못하고 동동거린다. 오늘은 내가 살아갈 날 중에 가장 젊은 날이기도 하지만 또 내가 살아온 날 중에 가장 나이든 날이기도 하니까 나는 막 현명해서 이것도 척, 저것도 척척, 막힘없이 척척 가고 싶은데 척척은 커녕 ㅊ자 하나 쓰고 이게 맞나 ㅈ인가 이러고 있는 거 같아서 갈길이 멀다.


그래도 그럼에도 이런 시간은 좋다.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보다 펑펑 울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와인이 생각나고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저장해 둔 플레이 리스트를 실행한 후 열어둔 베란다 문에서 늦여름의 바람이 불면 와인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한 모금만 먹는 건 비정상) 이상하게 혼자서도 벅찬 순간이 많은데 그건 타고난 좋은 점인 것 같다.요즘은 어째 길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 자주인데 그래도 이런 시간들이 나를 지켜준다. 지켜준다,라고 쓰고 보니 ‘얍얍!’ 기합을 내지르며 검이라도 휘둘러야 할 것 같다. 얍얍, 나는 초가을이라고 쓰지 않고 늦여름이라고 썼어. 그 하나, 단어 하나에 여름에 대한 내 사랑을 실었다. 단어 하나에도 마음을 듬뿍 담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얍얍, 곱고 씩씩한 말로 나를 지켜 줘. 얍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