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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an 03. 2022

다들 단골 문방구 하나씩은 있었잖아요?

언제나 웃고 있는 조아 아줌마

어렸을 때 가족이랑 엄마, 아빠의 친구들 빼고 내가 사귀고 친해진 최초의 어른은 학교 앞 문방구 아줌마였다. 조아 문방구 아줌마. 여름에 꽁꽁 언 오렌지 맛 조아를 칼로 슥슥 따주던 조아 아줌마. 학교 앞에는 문방구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친구들 모두 단골 문방구가 있었고 내게는 조아 문방구가 그랬다.


학교 가는 길에 일 없이도 들러서 ‘아줌마!’하고 부르면 ‘학교 잘 갔다 와!’ 손 흔들어 주던 조아 아줌마. 그때는 학교 끝난 후에 친구들과 문방구에서 이것저것 사 먹는 게 제일 큰 재미였다. 여름엔 더위사냥이나 보석바를, 겨울에는 꿀맛나를 가장 많이 먹었지만 매일 빼먹지 않고 공을 들였던 건 뭐니뭐니해도 뽑기였다. 친구들은 칼 모양 엿도 잘 뽑고 가끔 어마어마하게 큰 잉어 엿도 뽑았는데 나는 운이 없어서 맨날 꽝만 뽑았다. 거의 매일 꽝, 꽝, 꽝. 한 달 내내 해도 칼 한 번이 안 나왔다. 손바닥 반만한 꽝 엿을 입안에 넣고 녹여 먹으며 과연 잉어를 뽑는 날이 있을까, 했는데 결국 그런 날은 졸업 때까지 오지 않았다. 어머, 정말 그랬네. 내가 꽝을 뽑을 때마다 같이 아쉬워하던 조아 아줌마, 어느 날은 아줌마가 꽝 엿을 하나 더 쥐여 주었지.


한번은 친구가 조아 문방구에는 없고 다른 문방구에서만 파는 물건이 있다며 사러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는데 물건을 사고 나오는 길에 문방구 골목에 서 있던 조아 아줌마랑 눈이 마주쳤다. 나는 왠지 뜨끔해서 재빨리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꼭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 날 학교를 가는데 조아 문방구 앞을 지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땅만 보고 빠르게 걸으며 그날 아침 인사를 걸렀다. 집에 갈 때도 조아 문방구 앞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부러 멀리 돌아서 갔다. 다음날 아침에도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문방구 앞을 지나갔던 것 같다. 이삼일째인가 아줌마가 지나가는 나를 보고 “학교 잘 갔다 와.”라고 인사해 주었는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줌마의 웃는 얼굴, 다정한 목소리 그게 좋았다. 학교 앞에 문방구가 참 많았는데 조아 문방구 앞만 유난히 따뜻하고 밝았다. 그건 마음의 힘, 유난히 밝고 따뜻하지.


어제는 동네 문방구에 갔는데 우리 집 앞에는 문방구가 없어서 길 건너 단지까지 걸어서 갔다. 웬일인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실내화를 사러 온 엄마와 두 딸, 장난감을 사러 온 어린 형제, 그리고 문방구 사장님. 벽과 바닥에 물건들이 꽉 찬 문방구는 다섯 명만 들어가도 만원이었다. 어린 형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딸 아이의 준비물인 모양자와 쫀드기를 사고 나왔다.


백 원 짜리 동전 열 개를 내고 모양자를 건네받는데 조아 문방구 아줌마 생각이 났다. 여기 이곳, 조아 문방구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문방구가 아직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모양자와 쫀드기가 든 까만 봉다리를 흔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좋았다. 어딘가에 조아 문방구가 여전히 열려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북적였던 예전 그대로, 흰머리만 조금 는 조아 아줌마, ‘학교 잘 갔다 와!’ 배웅해 주는 언제나 웃고 있는 조아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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