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라디오 녹음을 하고 왔다. 어느 날 출판사 대표님께 연락이 왔는데 라디오에서 내 책을 보고 출연 요청을 해 왔다는 것이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그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새벽 두 시까지 깨어 있었다. 식구들도 모두 잠들고 혼자, 나는 조금 무서워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익숙한 성우 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배우의 목소리를 더빙하셨던 분. 그 밤에, 익숙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보이지는 않는데 꼭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무서움이 가셨다. 보이지 않는 줄을 타고 내게 닿은 그 목소리 때문에 다른 세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뿐인데 공간이 달라졌어. 그때 나는 라디오 디제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목소리로 누군가의 밤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보다 멋진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멋지겠다고 생각했다. 라디오 출연 요청 메일을 열 때 딱 그 밤 생각이 났다.
녹음 하루 전에 미리 질문지를 받았지만 마땅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곤란한데, 그런 초조한 마음을 품고 부스에 들어가 앉았는데 너무 다정하고 친근하게 묻고 들어주는 디제이 은영선 성우님 덕분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래도 횡설수설, 끝나고 나니 그런 기분이었다. 뒤돌아 나오는데 다하지 못한 답이 그제야 떠올랐다. 일기를 써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자기를 알게 되어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 그제야 마음에 또렷이 떠올랐다. 늦고 말았지만.
쓰면서 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기분이 좋고 어떤 걸 견디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가급적 저에게 좋은 일을 해 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만의 기준이 생겨서 그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일이 늘었어요. 남의 기준은 나의 것이 아니니까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이 저를 크게 흔들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 저는 그런 게 정말 좋았어요. 내 기준으로 사는 게, 너무 진짜 같아서. 누굴 쫓거나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니까.
이게 나의 대답이었다. 나를 알게 되어서 좋은 건 나만의 기준을 갖게 되어서다. 내 기준대로 살 수 있어서. 정말 그렇다. 흔들려도 많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서.
나는 가끔 여러분을 곰곰이 생각하는데 눈, 코, 입도 표정도 목소리도 모르니까 어쩌면 더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지니까. 내일은 나의 목소리가 어딘가의 줄을 타고 흘러나올 텐데 여러분이 있는 공간에 배경처럼 깔리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했다. 그거야말로 정말 놀라운 일. 상상에서 걸어 나오면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도 한 꺼풀 벗으면 진짜에 한발 다가서는 거니까.
토요일 오전 11시에서 12시 FM 99.1 국악방송 은영선의 <함께 걷는 길>입니다. 서툴고 횡설수설해도 우리 못 만나도 만난 것 같을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