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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03. 2023

반의 반의 반 걸음만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해

책을 내기로 계약하고 글을 정리해서 모으는 중에 출판사 대표님이 ‘출판 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에 응모해 보자고 하셨다. 만약 선정되면 출판 창작 지원금 500만 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교정을 보기도 전인데 응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대강 묶어서 응모할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후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척 기뻤었다. 제법이네, 하고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책을 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책을 직접 받아 든 때보다 그렇게 만들어 나가던 시간들에 있다. 어딘가로 향해갈 때, 희미해도 환한 빛이 나를 이끌어주고 있는 기분에 휩싸일 때, 나는 혼자서도 자주 웃었다. 글을 다듬고 완성하며 너무 재밌게 놀았다.

막상 책을 내고 나니 허전하고 공허한 기분이 들어 놀랐다. 왜일까 생각했다. 골똘히 들여다보니 알 것 같았다. 모든 걸 보여주고 다 썼다고 생각했다. 더는 남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이 있다면 다 담아낸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이제 텅 빈 걸까, 울적했다.

내가 늘 달리는 길. 몸을 움직이면 나쁜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어제저녁 달리기를 하는데 ‘그 생각은 틀렸을지도 몰라.’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늘 달리는 구간의 반환점을 돌고도 한참을 더 온 곳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그래, 그 생각은 틀렸을지도 몰라. 뭐든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한 발 딛었을 뿐이야.

뭘 하든 다시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달리기가 덜 힘들었다. 이 희망은 봄 덕분일까.

얼마 전에 나는 아주아주 작고 희미해도 희망은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의 반 걸음이라도, 반의 반의 반 걸음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꼭 필요해. 그런데 어느 때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것 같은 그 캄캄한 기분을 상상하면 울고 싶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우리가 ‘성큼’ 걷고 싶어 해서일지도 몰라. 오늘은 반의 반의 반의 반 걸음만 걸어야지라고 생각하면 발밑에 희망이 밤하늘의 별처럼 쫙 깔렸을 수도 있어. 보이지 않을 때도 빛나고 있는 별처럼, 실은 우리 발밑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아주 작은 희망들이 쫙 깔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나는 발밑의 작은 그 빛 하나를 밟았고 그러고 나자 빛에서 또 다른 빛으로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밑에 별이 쫙 깔렸잖아, 어디로 딛어도 희망이다. 당신 발밑에도 무수한 희망들이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의 반의 반의 반걸음만, 이라고 생각하면 고개를 반짝 들 희망들.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봄은 희망을 발견해 내기 좋은 계절이니까.

작아도 은행잎은 자기의 모양을 하고 있고 땅에서도 벚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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