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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Feb 27. 2022

행복에도 슬픔의 몫이 있다

아빠와 크레파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방학 때만 되면 나는 한국에 나와 며칠씩 머무르다 갔다. 올 때마다 가족들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그런 여름휴가 중의 어느 날 쓴 일기다. 행복 속에도 슬픔이 들어 있구나 알게 된 어느 날의 일기.  


*행복,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아빠 차를 타고 가는데 '푸른 바다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나왔다. ‘행복이란 멀게만 느껴지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란 대목에서 울컥해져서 크게 목 한번 가다듬고 열심히 따라 불렀다. 노래로 눈물을 누른다.

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슬픈 일들은 많다. 교장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치매가 온 것 같다. 밤낮 교대로 엄마와 작은 이모, 삼촌들 그리고 외숙모들이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있는데 자꾸 옷을 전부 벗고 누워계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있잖니, 자꾸 나하고만 갈 데가 있다는 거야. 영호야 꼭 너하고 가야 한다, 그러는데 그래도 그 얘기가 듣기가 좋더라."

엄마는 금방 옷을 갈아입혔는데도 또 오줌을 싸 놓은 할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엉덩이를 두 번이나 때려주었다는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 얘기가 듣기 좋더라.'는 말을 듣는데 또 목이 뜨거워졌다. 사람은 다 똑같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장 사랑받고 싶다.


오사카에서 지호와 내가 온다고 아빠는 며칠 휴가를 내셨다. 여름인데 바다라도 다녀오자고 해서 오늘 나서기로 했다. 아빠는 엄마랑 언니, 나, 지호가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데 ‘먼저 나가 있을게.’하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셨다. 분홍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 산뜻해 보였다. ‘아빠 왜 벌써 나가?’하고 묻자 ‘기름도 넣고 가는 길에 마실 커피랑 지호 간식 미리 사놓으려고 그러는 거겠지.’라고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서두른다고 해도 여자 넷이 외출 준비를 하다 보면 원래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어지는 건 기본이다. 넷 중에 가장 늑장을 부린 건 나였고 우리는 결국 아빠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나갔다. 차 안에는 지호가 좋아하는 고래밥, 초콜릿에 나랑 언니가 좋아하는 커피, 엄마가 마실 박카스까지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려놓고도 아빠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몽산포 해수욕장.

이름 예쁘다.

나 근데 빵 먹고 싶어.

어디 빵집 갈 거야?

두서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출발했고 지호가 동요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했다. 뽀뽀뽀, 정글 숲 이런저런 노래 끝에 아빠와 크레파스가 나왔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우리는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 무심코 앞을 봤는데 아빠가 핸들을 잡은 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고 계셨다.

그때, 아빠의 손에서 아빠의 마음을 보았다. 아빠 지금 좋으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울컥했다. 출발 전까지 조금쯤 귀찮아했던  마음 때문에  그랬다. 아빠는 우리와의 시간이 그냥 좋은 것이다.  순간 아빠와의 시간을 정말 좋아하는 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언제까지나 나에게 유리한 불공평한 관계라는  깨달았다. 눈이 뜨거워져서 나는 아빠와 크레파스를  크게 따라 불렀다.

바람 부는 몽산포 해수욕장은 정말 좋았다. 해변가에 평상을 하나 빌려 아빠와 나란히 앉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호가 조개를 잡는다며 허리를 구부리고 열심히 모래밭을 뒤지고 있었다. 언니는 노란 플라스틱 통을 들고 지호 뒤를 따라다니며 웃었고 엄마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나는 아빠 옆에 앉아 '아빠 여기 진짜 멋있다', '너무 좋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빠는 바다 쪽으로 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그저 '그래. 여기가 얼마나 좋다고.'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아빠가 분명 행복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행복한 순간에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행복이 오롯이 기쁨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에는 누군가의 인내나 노력, 눈물이 들어 있으니까. 행복에도 슬픔이 섞여 있는 걸 보면 슬픔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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