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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12. 2022

당신의 평안을 빌어

작별의 노래

꽃이 피었다. 회사 근처에도 집 근처 둑길에도 연두색 새잎들이 얼마나 예쁘게 올라오고 있는지 모른다. 곧 씩씩한 초록으로 바뀌겠지. 앙상한 가지에 연두색 잎이 돋고 그 잎이 다시 초록이 되고 노랑이 되고 바람에 날려 쓸쓸히 떨어져도 이제 남편은 없다.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런 생각도 오래 했다.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도 꿈이 아니라서 놀랐다. 깊이 생각하거나 추억을 곱씹어 보는 일은 아직 하지 않는다. 아침, 점심, 저녁, 어제, 오늘, 내일을 ‘산다’는 생각만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일 년도 지나겠지. 그러다 어느 날은 용기를 내어서 지난 시간들을 곱씹어 보는 날도 오겠지. 그날, 엄청난 슬픔과 눈물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올 그날, 그날 역시 잘 보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또 한참을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를 만나서 행복했을까. 행복하게 해 주려 노력했던 것 같은데 한참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아주 오래된 꾸깃한 쪽지를 화장대 서랍에서 발견했다. 최근보다 더 삐뚤빼뚤한 예전 남편의 글씨체. 그 쪽지의 마지막에 남편은 이렇게 썼다.

“여튼 살면서 자잘한 어려움, 난처함, 쪽팔림, 선택의 기로, 연민, 자조, 탄식, 슬픔(많다이? 응) 얼마나 많겠어. 난 가족이나 아니 가족도 함께 하기 좀 어색한 위에 얘기한 슬픔 등등 선희랑 항상 함께 하고 싶어. 물론 좋은 일은 기본이고. 난 꼭 선희한테 장가갈 거야. 선희가 딴 놈한테 가면 술 처먹고 땡깡부리더라도 꼭꼭꼭 선희한테 장가 갈 거야. 맹세해. 이 맘 안 변하겠다고. 칸이 작다. 여튼 동화.”

그 쪽지를 발견하고 펼쳐봤을 때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웃음이 났다. 그래서 웃고, 다시 울게 될까 봐 두려워서 얼른 접어 서랍에 넣어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보고는 울고 말았다. 웃으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울음이 났다. 그렇게 꼭 꼭 꼭 장가 오고 싶어 했으니까 행복했겠지. 나는 이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버틸 수 있는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놀랍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너무 감사하게도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장례 지도사 분이 해 준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엄마가 웃어야 아이가 웃어요. 아이를 슬픔 속에 두면 안 돼요. 꼭 아빠가 있다고 아이 잘 키우는 거 아니니까 힘내요. 남편 없는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예쁜 지호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용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 정리를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도 모두 고마웠다. 은행에서 만난 분들, 구청에서 만난 분들 모두 따뜻했다. 비 오는 어느 날 아침엔 우산을 깜빡하고 나갔는데 길에서 만난 모르는 아주머니가 우산을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다 왔으니까 이 우산 쓰고 가요.’라고 말하며 우산을 쥐어주는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나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했겠지. 모두가 웃으며 나와 지호를 위해 힘껏 애쓰고 있다. 우리 가족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힘이 있는데 각자가 내고 있는 그 눈부신 힘 속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기대고 있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자체가 축복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찾아와 준 사람들, 애달파해 준 사람들, 안타까워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경황이 없어서 모두에게 알리지는 못했다. 뒤늦게 알고 어렵게 연락을 해 준 사람들까지 모두 고마웠다.


힘든 내내도 나와 지호를 향한 염려와 사랑이 우리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사랑이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걸 느꼈다. 누군가 한숨을 쉬며 나를 떠올린 그 순간들, 그 염려들이 거짓말처럼 나에게 닿아 나는 말하거나 보지 않고도 그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음들 덕분에 괜찮겠지, 하고 앞날을 낙관했던 감사한 순간들도 있었다. 비록 지금은 어두워도 앞으로는 어둡지 않겠지 믿었던 순간도 있었다. 누가 봐도 불행하다고 할 만한 상황이지만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어. 끝장은 그런 게 끝장이다. 어떤 일을 겪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겪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꽉 다잡는다. 나의 행복이 우리 지호의 행복이므로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예정인데 그 시작이 어디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아직은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꼭 닿을 것을 믿는다. 행복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니까.

다만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당신의 평안, 지금은 그 누구보다 당신의 평안을 빈다. 여보, 간절히 당신의 평안을 빌어. 당신의 평안을 빌어.


2018.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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