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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un 21. 2022

새해 첫날 찾아온 당신

작별의 노래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지호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지호가 먼저 나를 태워주었고 그 뒤에 내가 지호를 태워주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꿈이 그렇듯 어디로 가는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오사카라고 생각했다. 긴 언덕을 올라갔더니 열차가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지호는 자전거에서 내려걸었고 나는 애를 쓰며 자전거를 끌고 갔다. 열차를 타고 집에 온 나는 너무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남편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남편은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어디 갔었어. 깜짝 놀랐잖아.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애가 탔는 줄 알아? 나는 속으로 이런 말을 삼키며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안도감을 느꼈다. 남편은 내가 해 놓은 메모를 두고 놀렸다. 가끔 나는 남편의 일을 도와주었다. 학생들이 쓴 독서감상문을 읽고 A, B, C로 분류하며 짤막한 소감을 덧붙인다든가 그런 몇 가지 일들. 꿈속에서의 내가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해서 점수를 메모해두고 뭐라고 덧붙여 두었던지 남편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너 채점해서 메모해 두었더라? 뭐라고 코멘트도 쓰고 제법 선생같이 했던데? 지는 시험도 못 보면서. 그러고 남편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뒤에 남편은 잘하긴 했더라고 덧붙였다.

오랜만에 듣는 남편의 농담. 남편의 유머. 남편은 고맙다는 말도 꼭 그렇게 했다. 그래도 나는 다 알았다. 남편이 무척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거. 남편의 다리를 베고 누워 그 말을 듣는데  그 말투, 그 농담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무 뼈저리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너무 나라는 인간이라 좋은 기억 같은 거 나도 모르게 잊고 지냈다. 억지로 잊고 지낸 게 아니라 그냥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며 지낼 수는 없으니까 지금과 지금과 지금의 나를 위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더욱 지금을 살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꿈이.


꿈이,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행복한 순간들을 고스란히 살게 해 주었다. 종종 남편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남편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좋았다. 살살 잠이 쏟아지는 그 기분이 좋아서 자주 귀찮게 했다. 그럼 남편은 불평 한마디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거 다 기억 안 하고 살고 있었는데 꿈에서 다시 반복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서 나는 너무 울어버렸다. 울다가 남편의 손을 잡았는데, 안 잡힐 것 같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는데 뭔가가 잡혀서 너무 울어버렸다. 남편이 내 등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댔는데 정말로 무언가 닿아서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울면서 잠에서 깼다.


눈물이 너무 났다.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속 울었다. 사실은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일찍 잠들기는 하지만 깊이 잠들지 못해서 새벽에도 늘 깨어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들이 무수히 지나가느라 깊이 잠들지 못했다. 깊은 잠, 그것이 영영 달아나버리면 어쩌나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걱정한 적도 많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서, 내가 가진 건 막연한 낙관이나 용기뿐이라서 그런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 수 있나 자주 자신이 없어져서 밤마다 자면서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거 다 알고 와 준 거 같았다. 다 알아, 너 힘든 거, 이해해,라고 말해주려고 내 꿈에 와 준 거 같았다.

영혼을 믿지만 내가 생각하는 영혼은 마음 같은 거라서 살아 있는 동안에나 이어져있지 죽음 후에는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 어쩌면 영혼이라는 게 정말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늦게 잠들었는데 오늘도 새벽 일찍 일어났다. 책을 읽다가 깜박 다시 잠들었는데 잠들길 잘했다. 남편의 손이 닿았던 등의 감촉이 너무 생생하다. 그건 뭐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었다.


당신이 머리 쓰다듬어 주었던 거 이제야 다시 떠올린 거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새해 첫날이라고 응원처럼 꿈에 와 준 것도 고맙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그냥 좋았어. 다시 만나서 그냥 좋았어. 나를 염려해 주고 있구나, 느껴졌어.


한 해의 마지막이나 새해의 시작 같은 거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와 준 걸 보니 영 의미 없는 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살면서 계속 힘내기가 쉽지 않을 거 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제쯤은 누구나 힘에 부치는 일 한 두 개쯤 품고 산다는 것도 알겠다. 부디 너무 초조해말고 천천히 둘러보며 올 한 해도 무사히 보내면 좋겠다.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결국 시작을 위한 다정한 응원이었던  같다.   해가 시작되니까, 용기를 내라고 남편이  멀리서 보낸 슬프게 다정한 응원. 그럼 당신의 시작은 내가 응원할게. Happy new year.

202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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