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박선희
나는 이제 쉰 살밖에 안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을 거야. 몇 권 더 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몇 년 전에 나는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당연히 나의 이야기였고 물론 나였다.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턱없는 수준의 글이었지만 어쨌든 그 일을 끝내고 나자 인생에 몇 놓이지 않은 무거운 문 하나를 통과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라는 사람이 걸어온 인생을 묶어 안에 두고 문을 닫아 건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문 하나를 겨우 연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으나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인간도 인생도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 타면 꺼지는 초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모두 태우고 사라지겠지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것'이라고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누구나 곧 영원히 잊혀진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후에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아마 서로 많이 잊고 잊혀질 것이다. 잊은 만큼 잊히겠지. 다만 만약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우리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평범한 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장소는 종이 위가 아니다. 우리의 흔적은 서로에게 남겨둔다. 나를 기억하는 네가 '나의 흔적'이고, 너를 기억하는 내가 바로 네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너의 흔적'이다. 서로를 기억하며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네가 사라질 때 나의 흔적도 사라질 테지만 네가 사라진 후 나의 흔적이 사라지는 일 따위는 전혀 아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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