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대, <올 들어>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날
올 들어 가장 긴 식사
새는 울지 않고
떨어지는 잎을 들려준다
한 잎 또 한 잎
올 들어 가장 긴 목욕
올 들어 가장 가벼운 공기
하얀 고양이 둘 누워 있다
올 들어 처음으로 듣는 낮달
처음으로 녹는 아이스크림
올 들어 가장 이른 기일
올 들어 가장 느린 해
넓은 잎을 가졌던 나무의 음악과
우리의 그림자가 만날 때
저편의 시간을 들어 보기도 하는 것
올 들어 가장 고요한 골목
올 들어 가장 선명한 창
날짜를 잘못 기억하고
자신의 집을 몰래 바라보는 것
구두는 뒤로 놓여 있다
올 들어 가장 적은 강수량
올 들어 가장 천천히 타는 향
따뜻해지면서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면서 고요해지는
올 들어 가장 잊기 좋은 날
김성대, <올 들어>,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중
얼마 전에 성대 오빠가 오사카에 왔을 때 내 손금을 봐주겠다고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이제 큰 고민은 다 지나갔네,라고 말해서 '나 일찍 죽는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고민이 다 지나갔대?'라고 말하며 웃었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생각나는 게, 어느 날 아침엔 어쩌면 그 말은 그냥 오빠가 나를 아껴서 해준 말인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 시 속엔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많이 들어 있어서 어젯밤엔 모처럼 시를 외워봤는데 지호에게 시집을 주며 틀린 곳 없나 봐줘, 하고 외워나갔더니 네 군데쯤 틀린 곳을 지호가 바로 잡아 주었다. 올 들어 가장 잊기 좋은 날, 하고 외우기를 마쳤을 때 지호가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뭔가 모르겠는데 아름다운 느낌이 들어'라고 말하는데 지호의 눈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르겠는데 이 시 아름다운 느낌이 들어,라고 지호가 세 번쯤 말했고 나는 시를 외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일기를 썼을 때 지호는 아직 유치원생이었고, 나는 ‘그럼 나 일찍 죽는 거야?’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 모든 걸 남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변해서 이제 지호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고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죽는 거야?’ 같은 말은 하기 힘든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이제 없다. 그런데도 다시 꺼내 읽은 저 시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 눈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던 지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작은 행복으로 벅찼던 내 마음도 기억난다. 내가 시를 외우고 지호가 열심히 시집을 들여다보는 동안 남편은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을까. 이제 알 길이 없네.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날, 올 들어 가장 긴 식사, 새는 울지 않고 떨어지는 잎을 들려준다, 한 잎, 또 한 잎. 다시 소리 내어 읽어 보는데 그때와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그래도 아직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게 남아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