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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02. 2022

기분파의 최후

와인을 라벨 보고 샀습니다만

봄이 오고 있다. 얼마 전의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를 저질러버렸고 저지른 일의 여파는 생각보다 커서 한동안 매우 매우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무 괴로울 땐 그 괴로움에서 언제까지고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몇 배나 더 괴로워지는데 이번에 내가 그랬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게 무엇보다 괴로웠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책임을 진다는 건 뭘까, 책임을 진다는 건 괴로움을 감당한다는 뜻일까. 괴로워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덤덤히 받아들이는 일일까.


어쨌든 괴로웠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을 저질렀을 때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는 화살을 어디 다른 데로 돌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 화살을 온통 내쪽으로 꽂으려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래, 나는 얼마나 사소한 존재야. 나는 막 우주를 상상했다. 와, 그거 알지? 우리 은하가 어머어마하게 넓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별이 있고 지구는 은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점 같은 거잖아. 은하의 품에서 지구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구도 아무것도 아닌데 하물며 지구에서 먼지 같은 나는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냐고. 그렇게 사소하기 그지없는 나의 괴로움 따위 진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맙소사, 고작 먼지 따위의 괴로움이 왜 이렇게 괴로운 거야. 마음은 좀처럼 달래지지 않았다. 땅바닥을 뚫는 게 아닐까 싶게 내뱉은 한숨의 퍼레이드와 두 차례에 걸친 큰 울고불고 후 나는 별도리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 괴로워도 할 말이 없지, 나는 나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언제나처럼 흐르고 나니 공기 속에 봄이 묻어왔다. 출근길에 붉은 매화꽃을 만났다. 바람이 귓가에 ‘봄봄’하고 불어왔다. 내가 참 면목이 없는 사람으로서 웃음이 나질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사 복도에서 큭,하고 몇 번이나 웃음이 터졌다. 삼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아 몰라, 그러더니 나는 퇴근길에 와인을 두 병이나 사고 말았다.

이 매화는 몇 년째 우리 동네에서 봄마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와인을 고를 때 어느 나라 와인인지 품종은 뭔지 이것저것 살펴보는데 나는 이번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라벨을 보고 고르고 싶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기분대로 고르고 싶었다. 와인샵에 들어설 때부터 이건 봄맞이 와인이야 라고 혼자 이름을 붙였으니 봄같이 예쁜 옷을 입은 와인을 고르고 싶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흰 꽃과 파란 꽃이 예쁘게 그려진 레드 와인을 먼저 고르고 화이트도 골랐다. 마음 한 구석에 맛없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은 가볍게 넘기고 싶었다. 봄이잖아. 이 정도 기분의 사치는 부리고 싶었다. 와인이라도 마음대로 사 보자!


와인을 들고 집에 오는데 기분이 좋았다. 봄이 오니 와인을 사자고 결심한 것,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라벨만 보고 고른 것, 한 병도 아니고 두 병이나 산 것, 맛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라고 생각한 것 이 모든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마음도 기분도 변한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울 땐 괴로운 수밖에 없어, 그렇지만 그 마음이 영영 이어지는 건 아니고 어두운 마음도 오래 품기는 힘든 거구나 그런 걸 확인했다. 영영 계속되는 것이 없다는 게 이럴 땐 또 희망적이다.

두 차례의 울고불고 중 2회차, 내 울고불고를 지켜봐 준 퇴근길 맥주

집에 와서 두근거리며 와인을 땄는데 맛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오늘 산 와인의 역할은 맛이 아니었다. 예쁜 옷을 입고 우리 집까지 같이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와인 두 병과 함께 집에 오면서 모처럼 마음도 봄 같았으니까. 나는 와인을 따라둔 채 기다렸다. 날아갈 것은 날아가고 빠질 것이 빠지고 나면 훨씬 맛이 좋아진다는 것을 아니까. 두었다 마시자 제법 맛있었다. 역시 시간이 필요해. 뺄 건 빼고 날아갈 것은 날아가, 조급해말고 기다려, 맛이 들려면 기다리지 않고는 안 된다. 비단 와인만 그런 건 아니지. 우리 마음도 시간이 필요하다. 빠질 건 빠지고 날아갈 것은 날아갈 시간. 기다리면 아문다.


기분파는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는다. 엔딩보다 지금의 행복을 앞에 두기 때문에 엔딩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헛발질도 하게 되니 기분파에게 해피엔딩이 주어지지 않는 데도 불만을 터트릴 수 없다. 라벨이 예뻐서 산 와인이 맛없는 것처럼 기분파의 최후에는 후회와 쓰라림이 올 가능성이 높다. 실은 나의 잘못도 기분파의 말로 같은 거였다. 좋아,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다짐하고, 다시 살려. 기분을 일으켜 세운다. 언제나 지금의 기분을 맨 앞에 두고 스스로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게 특장점이니까 기분파로서 쌓아온 내공을 믿어 본다. 막다른 곳에서는 조급해 말고 천천히 기다린다. 시간은 언제나 좋은 것을 주니까. 따라두었던 와인을 비우고 한 잔 더 따른다. 두 잔째는 더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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