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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03. 2022

어느 하루

인숙이 이모의 희경 미용실

인숙이 이모는 엄마 친구인데 어려서부터 우리는 그냥 인숙이 이모라고 불렀다. 인숙이 이모는 오래된 동네의 골목에서 이십 년도 넘게 미용실을 하고 있다. 이모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딸 이름의 첫 글자와 아들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미용실 이름을 지었다. ‘희경 미용실’, 인숙이가 해도 미용실은 ‘희경’. 미용실이 있는 골목에는 철물점과 돼지갈비 집, 슈퍼가 있는데 미용실 맞은편에는 3층짜리 낡은 다세대 주택도 있다. 다세대 주택 앞에는 ‘외부 차량 주차금지’라고 써 붙여 놨는데 안에서 차 한 대가 나오려면 입구에선 그 차가 빠져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만큼 별 수 없이 비좁다.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헤어캡을 쓰고 소파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 쪽을 쳐다보셨다.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들어가니 몇 년 만에 만난 이모가 어, 선희 왔구나, 하고 짧게 반겨 주었다. 엄마는 십 년 단골답게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럽게 믹스커피를 타 마시고 손님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머리 할 때 앉을 거울 앞에는 의자가 세 개, 차례를 기다릴 때 앉는 긴 소파가 하나. 의자가 세 개라도 사장도 직원도 인숙이 이모뿐이라 손님들은 번갈아 가며 맨 오른쪽 의자에만 앉는다. 우리까지 앉으니 소파는 만원, 모처럼의 휴일이라 염색과 커트를 하러 왔다는 택시 기사님은 아무도 앉지 않는 맨 왼쪽 거울 앞 의자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 쓰고 계셨다.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기사님은 쉬는 날인데도 희경 미용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악보 공부를 하신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할머니 한 분이 쪼르륵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오늘은 웬일로 손님이 이렇게 많으냐고 한마디 하시길래 얼른 일어나 자리를 내어드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웃으며 두 번 거절하시더니 세 번째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앉으셨다.

웬일로 이렇게 손님이 많아

몰라, 몰라.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오늘이 입춘이라는데 올해 대박 나려나 봐.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고 십 분쯤 지났는데 할머니가 조용히 일어나 나중에 오겠다고 나가셔서 ‘어떡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실 것 같아 그냥 가신 건가 봐요’,라고 안타까워 말했더니 인숙이 이모가 ‘응, 그냥 마실 나오신 거야. 당뇨가 있으셔서 식사하시고 나면 꼭 한 번 들르셔’,라고 말해 주었다. 손님이 아니었구나, 할머니. 당뇨가 있어서 운동 나오신 할머니가 집에 가시고 이번에는 이웃집에서 오더니 떡 한 덩이 건네주고 바람처럼 돌아갔다. 동네 사랑방 같은 인숙이 이모의 희경 미용실.

떡을 나누어 먹는 동네 이웃들이 있다는 게 정다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모는 잠시도 앉지 못하고 번갈아 손님 머리를 만져주었는데 파마를 하고 계시던 아주머니 두 분은 파마를 풀고 보니 어느 쪽이 어느 쪽인가 알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뽀글이 파마였는데 '다르지 달라. 이게 어떻게 똑같니? 이 언니는 앞머리 쪽에 숱이 없어서 앞쪽을 부풀린 상고 머리형 파마고 저 언니는 뒤통수가 좀 납작해서 뒷머리를 뺀 스타일이야.'라고 이모가 설명해 주었다.

앞머리를 봉긋하게 한 아주머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시며 ‘여기요, 파마 값 이만 오천 원.’이라고 내미셨고 뒷머리를 봉긋하게 한 아주머니는 미안한 목소리로 ‘저 나 카드밖에 없는데.’라며 난감해하셨다. 인숙이 이모는 카드를 받으면서 그래도 꼭 한 마디를 보태어 ‘난 현금이 좋지만 뭐 어떻게 해. 카드밖에 없다는 걸.’하고 말해서 뒷머리 아주머니에게 ‘언니 미안해.’라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악보 공부에 빠진 택시 기사님을 제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서 역시나 맨 오른쪽 의자에 앉아 이모에게 머리를 맡겼다. 밝은 색으로 염색해 주세요. 이모 그런데 머리가 참 멋지시네요. 이모의 머리는 정말로 멋졌다. 멋진 숏커트, 뽀글거리지 않는 멋진 숏커트.

얼룩진 벽이나 몇 번이고 빨아 쓰는 일회용 헤어 캡, 옛날 목욕탕 타일이 깔려 있는 복도에 놓인 머리 감는 의자와 멀리 돌아나가야 하는 화장실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미용실이 낡아 보이지만은 않았던 건 인숙이 이모의 꼿꼿함 때문이었다. 인숙이 이모는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머리를 말고 머리를 감기고 머리를 털고 빗질을 해주면 그뿐, 그런 느낌이었다. 몇 시간을 서 있으면서도 다리가 아프다거나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모가 가장 많은 말을 한 것은 내 머리를 감길 때였다.


‘우리나라에 보면 십자가들이 얼마나 많니.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게 뭐니,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의 실천. 그런데 그 많은 교인들은 어디 가고 광화문이든 어디든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람 하나 잡겠다고 열심인 걸 보면 나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정말로 이해가 안가, 나는.’

이모,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는 거예요 라고 왜 나는 말을 못했을까.

이모의 손에 머리를 맡긴 채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이모가 감겨주는 대로 가만히 의자에 누워있던 나는 ‘네네’하며 고분고분 듣고 있었지만 마음까지 ‘네네’ 한 건 아니었다. 사람 하나 잡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에요 이모,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모의 말은 옳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말로 이해가 안가, 나는.’이라는 이모의 마지막 말에 담긴 절망 같은 탄식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나는 놀랐고 슬퍼졌다. 그래서 다시 ‘네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염색을 마치고 나자 엄마가 이모에게 삼만 원을 건넸다. 파마는 이만 오천 원, 염색은 삼만 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값이었다. 원래 다니던 미용실에서 내 머리를 해주던 분은 서른한 살, 눈웃음이 아주 예쁜 아가씨였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염색을 권하던 그분에게 가격을 묻자 ‘십이만 원이요’라고 말하며 그 정도는 들이셔야죠, 라는 듯 예쁘게 웃었다. 희경 미용실은 파마 이만 오천 원에 염색이 삼만 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몰라, 몰라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올해는 대박 날 건가 봐

아까 이모가 단골손님들과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모의 대박은 어느 만큼일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만큼의 돈만 건네고 나오며 그제야 맨 오른쪽 의자에 앉게 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올해로 예순둘이 되신 택시 기사님에게 ‘어떡해요. 저 때문에 너무 늦어지셔서.’라고 했더니 ‘첫차 타고 왔다가 막차 타고 가네!’하고 호탕하게 웃으셨다. 정답고 유쾌해서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이모는 추운데도 밖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막차 타고 가시는 아저씨에게 미안할 정도로 오래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고마워, 와 줘서.”

인숙이 이모가 고맙다고 말했다. 이모의 ‘고마워’에도 꼿꼿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런 꼿꼿함이 좋아서 ‘또 올게요.’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2016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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