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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08. 2022

공기의 말을 듣기

나의 오랜 취미

그제는 모처럼 일찍 퇴근했는데 퇴근길이 참 좋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이어서 좋았고,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꽃을 발견해서 좋았고, 공기가 깨끗해서 좋았고, 그냥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아직 밝은 하늘에 달무리가 잔뜩 진 둥근달이 떠 있어서 좋았다. 일은 무척 바빠서 일주일에 사나흘은 야근을 하고 있는데 한 번은 열두 시까지 이어진 적이 있어 놀라웠지만 처음이라는 점에서는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면 피곤하고 짜증 나겠지만 그날은 정말 열두 시까지 일을 계속 몰아쳐서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매우 놀랍게 했다. 그동안 꽤 한가롭게 살아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일 많은 사람들이 뭐 그까짓 일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을 시작하고 해오면서 ‘시간의 증발’이 의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유로서의 갸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갸웃. 벌써 4월, 어디로 갔을까 나의 1, 2, 3월은.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봄을 맞았는데 꽃이 질까 초조해할 새도 없이 봄이 휙휙 지나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휙휙이 내 쪽, 봄은 느긋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성취보다는 향유 쪽에 가까이 있다. 사흘 걸러 한 곡씩 좋은 곡을 찾게 된 것은 그 와중의 수확이고 노리플라이가 그 한가운데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기는 항상 근사한 말을 들려 준다.

아침에 밤에 집에서 나오거나 집으로 돌아갈 때, 어디로 가는 길, 누구를 만나는 길, 그저 걷는 길 그 모든 길 위에서 나는 공기의 말을 듣는다. 나뭇가지의 맵시, 구름의 흐트러짐, 하늘의 채도, 꽃의 포즈, 바람의 온도 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공기의 말을 듣는다. 길고 오래된 이것은 나의 취미 중의 취미인데 고요나 평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랑하는 지호에게 반드시 전해주고 싶은 걸 하나 꼽으라면 나는 이것을 꼽겠다. 매일이 다른 자연의 흐름, 공기의 말을 듣기.

버겁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쓸쓸할 때 어쩔 수 없이 혼자일 때, 온몸으로 공기의 말을 듣다 보면 마음이 수긍을 한다. ‘괜찮아, 별 거 아냐.’ 같은 위로를 담은 공기가 몸속으로 흘러들어 어느 때는 손가락 끝까지 퍼진다. 나는 매번 이것을 행운이라고 여긴다. 모두에게 이 행운이 어느 날 피어난 봄꽃처럼 찾아갔으면 좋겠다. 길 위에서, 내가 그렇듯 당신도 필연적으로 혼자일 때, 괜찮을 수 있도록.


2017.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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