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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Apr 29. 2022

오늘 하루도 살아냈구나

작별의 노래

어제는 설거지를 하고 빈 세제통에 세제를 채워 넣고 쓰레기를 버리려고 1층과 5층 사이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다. 지난 주말에는 세탁소에 세탁물을 갖다 맡기고는 지호와 조카를 데리고 예방접종도 다녀왔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같은 장면에서 웃고 별 거 아닌 대목에서 울었다. 대수로울 것 없는 이런 일들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자주 안도에 가까운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남편을 보낸 후 나는 하루를 살아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지내왔다. 오늘 하루도 살아냈구나. 그렇게 살아내다 보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안도에 가까운 행복도 느끼게 된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그 사이사이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란 말을 자주 생각했다. <이방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저 말이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다. 머리로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내가 해왔던 모든 경험들이 저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 같았다. 정답지만 무심한 세계 속에서 나는 어제 오랜만에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수라고 할 만한 것들을 다시 되돌리는 꿈을 꾸었다. 그때 더 오래 꽉 안아줄걸, 그날 나가지 말라고 붙잡을걸,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꿈속에서 실천했다. 그렇지만 알았던 것 같다. 이게 꿈이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남편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꿈속에서 나는 되돌렸었나? 그 후는 모르겠다. 깨고 나니 마음이 공허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캄캄한 새벽에 깨어나는 게 요즘의 나는 가장 견디기 힘들다.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공허함이 무서웠다. 공허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렵고 울면서 매일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사람이 될까 봐 두렵고 내 아픔만 가장 큰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내가 겪은 것들만이 진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까봐 그것도 두렵다.

내가 아는 것만이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 것.

그러나 공허한 꿈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제 행복했다고 오늘까지 행복한 건 아닌 것처럼.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요즘의 나는 세계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발견해내고 있다. 이 세계의 진짜 얼굴을.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겠지. 그래서 내가 발견해 낸 얼굴을 너는 진짜라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매일 생의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다.


바람이 불고 노을이 지면 내 마음은 충만한데 바람이나 노을은 내게 관심이 없다. 지난 금요일의 달은 무척 아름다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애가 탔다. 내가 애가 타거나 말거나 달은 홀로 계속 아름답다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빛 속으로 사라졌겠지.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세계는 아무 관심 없이 그저 흘러간다. 계속된다. 한없이 정다운데 세계는 나의 삶에 관심이 없다. 정답고 무관심한 이 세계,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세계야 너는 씩씩하구나. 흔들림이 없구나. 그리고 잠든 지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어떻게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세계처럼 나도 뒷걸음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지호가 넘어졌을 때, 뚜벅뚜벅 걸어온 나의 뒷모습을 보고 용기낼 수 있게 나는 세계처럼 살아내고 싶다.


밤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밤이 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세계.  세계처럼 씩씩하게 살아내다 보면 기쁨도 슬픔이 되고 슬픔도 기쁨이 되겠지. 그러니 의연할 . 그러나 밤과 아침이 서로의 반대가 아니듯 슬픔과 기쁨도 반대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잊지는 않았으면 한다. 세계는 쉽게 둘로 나눌  없고  세계를 이루는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는 것이라는  놓치지 않는 사람으로 이 생을 살아내고 싶다.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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