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

두 번째 이야기

by 박유신

2023년 5월 15일은 엄마가 깨어난 날이야.

너희는 묻겠지. 깨어나는 게 뭐냐고.

이게 참 설명이 어려워.

그래서 이렇게 천천히 글로 쓰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단다.


지금 너희는 각자의 길에서 만난 바위를 상대하느라 내게 열어줄 귀가 없지.

때로는 향기로운 꽃들에 정신이 팔리기도 할 테고 말이야.

그때는 원래 그래.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 너희에게는 그게 중요하고 나에게는 이게 중요하지.

너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모아 정리하는 것.



너희가 생겨나 자랐던 엄마의 자궁에는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녀석이 자라나고 있었어.

알면서도 모르고 싶어서 계속 병원 가는 걸 미루었지만 결국은 가야 했지.


그 녀석은 아마도 나의 우울을 먹고 자랐을 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날리고 싶었던 충동.

그 충동을 먹고 자랐을 거야.

너희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목소리를 높이고 꾹꾹 눌러 참아서 생긴 압력.

아마 그 녀석은 그 압력 때문에 불룩 삐져나온 풍선이었을 거야.


탁구공만 하다던가. 자궁 경부를 막고 있던 그 덩어리는.

여하튼 좀 이상했어.

그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나는 줄곧 그게 저승사자인지 궁금했는데 계속 정체를 숨기더군.

심지어는 수술로 없어진 뒤에도 그랬어.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면서 암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대.

의사가 내게 항암을 권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나 또한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었지. 원한 적도 없는데 생각할 시간을 길게 주더군.


엄마도 너희 외할머니를 닮아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해결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순식간에 공포에 압도되어 버리는 거야.

그런 내게 이도저도 아닌,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시간은 그 자체로 벅찼어.

그렇지만 뭘 할 수 있었겠니. 도망갈 곳이 없는걸.

곧잘 도망쳤던 꿈속의 세상, 망상으로 구축한 내 세상으로도 이번에는 도망칠 수가 없는 거야.


처음에 의사는 덩어리가 있던 자리까지 도려내는 2차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었어.

구체적인 날짜를 잡기 전에 또 몇 가지 검사를 했고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지.

샤워를 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단다.

문득 내 머릿속에서 대화가 오가고 있는 걸 내가 가만히 듣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야.

여태 '나는 그냥 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하나가 아니더라고.

대화를 주고받는 나도 나고, 그걸 듣고 있는 나도 나더라고.

너희는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니?

있다면 그 느낌을 꼭 기억하렴.

그게 너희를 너희의 삶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아직 없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거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너희는 그렇게 예정되어 있거든.


그때 내가 지켜본 대화는 이랬단다.

'원래 죽고 싶었잖아. 뭐가 문제야? 애들이 어려서, 부모님이 불쌍해서, 못 죽겠다며. 이게 암이면 이유 댈 필요 없이 그냥 죽을 수 있어. 다 끝내버릴 수 있다고.'

나1이 이렇게 말하더군.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나2가 튀어나오더라.

'그런데 그냥 이렇게 죽을 거면 왜 태어났을까?'

그러게 왜 태어났을까. 나는...


어렸을 때 나는 인간이 왜 태어나고 죽는지 궁금했어.

하지만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거니와 그 답을 찾으려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잊어버렸지.

나2는 오래전에 잊었던 그 질문을 꺼냈던 거야.


참 이상한 기분이었어.

죽어도 상관없다 하면서도 뭔가 내가 애초에 하기로 되어있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

혹시 내가 그걸 찾지 못하고 헤매는 바람에 지금부터 정신 좀 차리라고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

나1은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나2는 본래 예정된 삶이 있으니 삶을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나는 어느 쪽도 따르고 싶지가 않더라고.

내가 내린 결정은 이거였어.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기로 하는 결정 말이야.

어느 쪽도 따르지 않고 '나들'의 논쟁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가만히 있었지.


샤워를 끝냈을 때 내 마음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해졌단다.

'그냥 이대로 두자. 나를 죽음이 데려가는지 삶이 데려가는지 그냥 지켜보자.

만약 삶이 데려간다면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일 테고, 죽음이 데려간다면 그 또한 괜찮으니 그대로 받아들이자.'

내가 신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신의 뜻에 맡겼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었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놓아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어.


폭풍이 걷힌 바다처럼 평온한 마음이 되어 병원에 갔더니 2차 수술일을 한 달 뒤 다시 한번 검사를 하고 나서 잡자고 하더라.

암세포로 변이중인 건 맞는데 완전히 변한 세포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말이야.

분명히 한 달 전만 해도 당장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말하더니.

그때 나는 피식 웃었던 것 같아.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점점 더 강하게 내가 어떤 경계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또다시 주어진 한 달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병원에서 듣게 될 말이 달라질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생겨나는 확신에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그런 느낌도 낯설어서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나 싶기도 했어.


그 한 달 동안 내가 한 일은 한 가지였단다.

나 자신을 삶 쪽으로 돌려세우기, 그거 하나였어.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포기하려 했던 삶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졌거든.

내가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태어날 때 무슨 목적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거야.

정말 내가 어떤 경계에 있는 거라면, 삶 쪽으로 돌아서기만 해도 정말 삶이 주어질 것 같더라고.

그걸 실험해보고 싶어 졌지.


그때 나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상상해 봤어.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들어가던 망상을 버리고 현실을 이리저리 상상으로 변형해 가며 그 새로운 일상 속에서 밝게 살아가는 나를 그려봤어.

망상으로 살 때는 계속 잠만 잤었는데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까 이른 아침에도 눈이 떠지더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한 첫 단계였단 걸 그때는 몰랐지만 말이야.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병원에 가기 전날이었어.

잠자리에 들 때 나는 또 상상놀이를 했지.

암세포가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웃으면서 병원 밖을 나서는 내 모습을 그렸어.

상상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 상상 속에는 웃으면서 걸어 나오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내가 동시에 존재했고, 둘 모두 하나의 나로 인식되더라고.


2023년 5월 15일.

그날은 정확히 내가 그린 대로 일이 일어났던 날이자 세상은 고정된 게 아니고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대로 변한다는 걸 알았던 날이야.

알껍질이 깨졌던 날이지.


암세포는 나오지 않았고 다음 검진은 3개월 후로 밀려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어.

그냥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한참 동안 진동을 느꼈다는 뜻이야.

병원을 나와 쨍한 햇살 아래 발을 내디뎠을 때는 평생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상한 감각이 동시에 밀려들었어.

내 모든 감각이 달라져 있었거든.

그때는 청각과 시각, 후각이 달라졌다는 것만 알아차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감 모두, 그리고 육감까지 달라진 걸 알았지.


상상한 대로 이루어진 경험은 큰 충격이었어.

백만 년 전쯤에 써봤던 일기를 썼으니까.

그날 밤에 집에 굴러다니던 노트 한 권을 찾아서 메모를 했는데 이게 지금까지 하고 있는 아침 루틴이 되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내가 알고자 했던 답은 얻었어.

내가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말이야.




다음에는 달라진 감각과 더불어 시작된 청소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디까지 갈지, 내가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냥 이야기가 알아서 흘러가리라 믿어.


아, 하나만 더 이야기할게.

달라진 감각 때문에 약간 정신없는 와중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

수업을 하러 학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누군가 내게 커피를 주는 상상을 했어.

그런데 그날 수업을 하는데 진짜 원생 중 한 명이 커피를 주더라고.

"선생님, 이거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엄마가 드리래요." 하면서.

그때 뭔가 쿵 하는 느낌이 들더라.

5월 15일은 언제나 스승의 날이었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내가 왜 계속 선생님이라 불리는 직업을 전전했는지 알 것 같았거든.

태어난 목적.

어렴풋했지만 곧 알게 될 거 같더라고.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