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아, 현아.
2차 수술이 다시 한번 연기되었던 그날, 엄마는 앞으로 영원히 2차 수술 같은 건 없을 거란 걸 알았단다.
혹시 너희도, 아무 근거도 없이 어떤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걸 직감으로 안 적이 있니?
아마 있을 거야. 딱히 기억 안 난다고 해도 사실은 있었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직감으로 알게 된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고 흘려버리는 습관이 있거든.
근거를 찾아야 믿겠다고 판단하는 거지.
그런데 직감이란 건 말이야.
모든 인간에게 디폴트로 장착되어 있는 능력 같은 거야.
다만 쓰는 법을 잊어버려 퇴화된 감각이지.
몸으로 느끼는 오감은 상대적으로 은은한 여섯 번째 감각을 항상 압도해 버리니까.
하지만 기억하렴.
생각보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또 기억하고 있단다.
의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 있을 뿐 사라지지 않는 앎이 존재해.
어째서 그날은 내가 전날 상상한 대로 이루어졌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싶으면서도 '상상하면 이루어진다' 따위의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해서 어떤 판단도 못 내리겠더라.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
이제 정말 제대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처음 느껴보는 환희가 차올랐어.
흥분해서 정신이 없었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미세하게 찌릿거렸는데 그러고 나서 감각이 달라진 걸 알아차렸지.
가장 먼저 느낀 건 병원을 나서자마자 훅 끼쳤던 바다 냄새였어.
그건 이 도시의 냄새였지.
너희도 지금은 다른 지역에 살고 있으니 알 거야.
이곳 버스터미널에 내려섰을 때 느껴지는 공기 냄새 말이야.
내가 그 냄새를 마지막으로 맡았던 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왔을 때였을 거야.
그 후 이곳에 이십 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바다 냄새가 갑작스럽게 강하게 밀려오더라고.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항상 공기 중에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을 텐데 왜 여태 몰랐다가 갑자기 느껴졌을까.
달라진 건 후각만이 아니었어.
도로를 따라 걷는 동안 거리의 소음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들리더라.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들이 개별적으로 다 들리는 느낌이었어.
특히 새소리가 놀라웠어.
소음이 소음처럼 들리지도 않았거니와 무엇보다도 새소리가 맑고 분명하게 들리는 거야.
그동안 나는 가로수에 새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몰랐고, 그 새들이 지저귄다는 것 또한 알면서도 몰랐던 거야.
그리고 나뭇잎.
나뭇잎에 햇살이 반사되면서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
살면서 수없이 많은 길을 걸어봤고 길가 가로수도 수없이 봤지 않았겠니?
그런데 그날은 나무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게 봤다니까.
나무라는 게 원래 저렇게 예뻤나 하면서.
나는 이게 내가 흥분해서 일어난 일시적인 경험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지. 겨우 시작일 뿐이었어.
음식 맛에도 민감해져서 대충 아무거나 먹던 식습관이 저절로 사라져 버린 거야.
맵고 짜고 단 음식이 싫어졌고 인스턴트 음식과도 멀어졌어.
전에는 별로 즐기지 않았던 나물 반찬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고.
이렇게 달라진 와중에 가장 크게 느낀 감각이 뭐였는지 아니?
그건 연결감이었어.
이게 무슨 감각인지 콕 집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뭐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라고 할게.
정말 그랬어.
식물과 동물, 땅과 하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생기더니 이마저도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까 더 확장되었어.
돌이나 자동차 같은, 생명체가 아닌 사물과도 마찬가지로 연결감이 느껴지더라고.
나라는 존재가 분리된 실체가 아닌 거대한 뭔가의 일부라는 느낌이 갈수록 강해졌어.
어쩌면 이 연결감은 내가 명상 비슷한 걸 하게 되면서 더 선명해졌던 것 같기도 해.
명상이면 명상이지 명상 비슷한 거는 뭐냐고 하겠지만 그때 나는 내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우선은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었지.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유튜브를 보고 요가 동작을 고작 10분씩 따라 했어.
그때는 요가가 그냥 운동인 줄로만 알았거든.
매일 뭣도 모르고 따라 하다 보니 10분이 15분이 되고 다시 20분이 되면서 가만히 숨 고르며 앉아 있는 시간이 생기더라.
긍정적인 문장들을 따라 해 보라길래 속으로 따라 해 보고, 숨을 내쉬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내뿜으라길래 그렇게 하고, 그냥 그렇게 따라 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있는 그 시간이 마음이 편하고 좋더라고.
그 편안한 시간에 머물고 싶어서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기 시작했어.
고요한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는 거야.
정말이지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충전되는 시간이었어.
이삼십 대 때 자기 계발서를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었던 미라클 모닝이 뭔지 처음으로 좀 알겠더라고.
일단 나한테는 그 시간에 일어났다는 자체만으로 미라클이긴 했으니까.
뜨는 해를 멍하니 보고 있거나 아니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있기도 했어.
내가 언제부터 명상을 하게 되었나 돌이켜보면 그때가 시작점이었던 것 같아.
명상인 줄도 모르고 했던 거지.
그러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감각이 점점 더 예민해졌던 것 같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거든.
그 시작은 겨우 몇 개의 단어가 유발했단다.
명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단어를 떠올려봤어.
평온, 희망, 기쁨, 행복 같은.
살아서 할 일이 있다면 살게 될 것이고 아니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내가 나를 맡겨 버렸던 거 기억하지?
그런데 이제 다시 살게 되었으니 나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뭔가를 시작해야만 했던 거야.
그런데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눈을 감고 가만히 그 단어들을 떠올리기만 하는데도 거부감이 토할 것처럼 밀려드는 거야.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미치겠더라고.
내가 얼마나 오래 어둠 속을 헤맸던 건지 그때 확실히 알았지.
얼마나 오래 그 단어들이 품고 있는 뜻과 반대의 삶을 살았던 건지 알겠더라고.
그런데 얘들아, 모든 감정은 그 감정의 정체를 내가 인식하는 순간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단다.
이제 주도권은 내게로 넘어왔고 나는 내 마음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지.
본격적인 청소 얘기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너희가 집중을 못할 테니.
미리 말해 둘 수 있는 건 이거야.
마음을 청소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여러 곳이 청소 됐다는 거.
몸 상태도 변하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변하고 심지어는 물리적 공간도 변하더구나.
너희도 기억할 거야.
우리 집이 예전에 얼마나 지저분했었는지.
너희가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는 이유를 엄마는 그동안 알면서도 모르고 싶어 했던 거더라고.
청소가 일종의 신비 체험이란 걸 처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