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노래는 내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합창대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추던 순간, 교회에서 모두와 함께 찬양하던 시간, 심지어 혼자 방 안에서 조용히 흥얼거릴 때조차, 나는 노래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와 따뜻함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 신과의 연결, 그리고 나 자신과의 연결을 통해 노래는 내게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 주었고,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작은 등불이었다.
지난 5월 마지막 토요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자리한 여백서원 괴테마을에서의 공연은 내 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여백서원은 서울대 전영애 명예교수가 약 3200평 부지 위에 ‘인생정원’ 같은 문화공간으로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독일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음악회 시작 전, 전영애 교수님이 괴테의 시를 하나하나 천천히 훑으며 해설을 들려주셨다. 교수님의 떨리는 목소리로 독일어 시를 낭송해주실 때, 그 소리는 내 귓가에 부드럽게 스며들어 마치 시간의 결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이어진 공연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졌다. 전문 연주자가 아닌, 변호사와 교수 같은 비전공자들의 취미로 다져진 무대여서 그런지 오히려 더 따뜻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앵콜송 ‘보리밭’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이어져 목청을 높였다. 그날의 소리, 그날의 공기와 온도까지 아직도 내 안에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나는 원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나간 합창대회의 긴장감, 고등학교 시절 반별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맡아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열기. 대학부 찬양단 리더로 88올림픽 당시 33개국 선교팀과 함께 컨퍼런스에서 합창하던 감동, 호주 아델레이드 드라마팀이 마임으로 복음 전하기 전 한강 둔치나 공원, 지하철역에서 함께 부르던 찬양의 울림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내 안에 오래도록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노래를 조금씩 멀리하게 됐다.
그런 내게 여백서원의 그날은 다시금 나를 깨우는 순간이었다. 전영애 교수님의 ‘들에 핀 장미(Heidenröslein)’ 해설은 내 기억의 문을 하나하나 두드렸다. 슈베르트와 모차르트가 같은 시로 각기 다른 곡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그 노래가 괴테의 시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낡은 기억이 다시 숨을 쉬듯, 그날의 공연은 내 마음을 다시 노래로 물들였다.
여백서원의 소리는 내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교수님의 해설과 관객들의 합창은 나를 다시 노래로 이끄는 작은 초대 같았다.
나는 그날, 객석에 앉아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횡격막을 충분히 활용해 호흡을 깊이 끌어올린 뒤, 구강과 비강을 넓게 열어 공명된 소리를 만들어냈다. 소프라노 솔리스트처럼 성량을 최대한 살려, 가곡을 부를 때처럼 편안하면서도 힘있게, 내 목소리를 건물 안 가득 울렸다. 물론 내 소리가 지나치게 튀지 않도록 호흡과 발성의 균형을 신경 썼지만, 그날은 모든 공연자와 관객이 한마음 한뜻으로, 각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힘과 열정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바닥과 계단, 의자와 복도, 심지어 문밖까지 사람들이 가득 찬 공간에서,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의 열망과 스트레스를 노래로 풀어내듯, 소리는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창밖으로 퍼져나가 숲속과 하늘로 흩어지는 듯했다.
내 목소리는 원래 크고 전달력이 좋아 합창에서는 항상 소리의 위치를 조절하며 다른 목소리와 어우러지도록 신경 쓰지만, 이번에는 계산 없이 오롯이 내 소리를 믿고 편안하게 내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껏 소리를 내었음에도, 그날의 노래는 내 목소리만이 아니라 모두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은 나만의 소리가 아니라 모두의 숨결이 함께 어우러진 노래였다. “이렇게, 함께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구나.” 그 벅찬 느낌이 다시 나를 살아있게 해주었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내 마음 깊은 곳에 다시 기쁨이 차올랐다. 한동안은 PC 앞에서만 머물던 나였지만, 이제는 다시 노래하고 싶다. 노래로 마음을 나누고, 노래로 위로를 전하며, 노래로 내 하루를 채우고 싶다.
노래를 부를 때면, 내 안의 감정이 자유롭게 흘러나온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목소리에 실려 세상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는 조금 더 솔직한 내가 된다. 노래는 내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언어였다. 때로는 말로는 다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한 소절의 멜로디로 더 깊이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살아 있음을 느꼈고, 내 안의 상처마저도 다정하게 어루만질 수 있었다.
내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노래는 내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합창대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추던 순간, 교회에서 모두와 함께 찬양하던 시간, 심지어 혼자 방 안에서 조용히 흥얼거릴 때조차, 나는 노래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와 따뜻함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 신과의 연결, 그리고 나 자신과의 연결을 통해 노래는 내게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 주었고,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작은 등불이었다.
여백서원의 그날, 다시 노래를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 소리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열정을 깨웠고, 다시 노래하는 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키웠다. 노래는 내게 쉼터이자, 때로는 용기였다. 바쁜 일상에 치이고 지칠 때마다, 노래 한 곡이 내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나 역시 노래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며칠 후,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사진첩을 펼쳐봤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합창대회에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 지휘자로 무대 위에 서 있는 내 모습,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며 친구들의 미소를 받던 순간까지, 목소리로 이어졌던 나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나는 삶에 다시 소리를 불어넣기로 했다. 피곤하고 바쁜 날에도 “지금 이 순간 노래해야겠다”는 마음이 떠오른다. 사진첩 속 추억처럼, 소리의 순간들을 마음 깊이 꺼내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준비를 해두고 싶다. 그리고 그 노래가 나만의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고 따뜻하게 감싸주기를 바란다.
생활 속 노래는 나의 작은 빛이자 쉼터가 되었다. 주일과 수요일, 금요일 교회 찬양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도 노래가 자연스레 스며들기를 바란다. 여백서원에서의 그날처럼, 노래는 언제나 내 마음을 일깨우는 다정한 손길이 되어줄 것이다.
마치 책장 구석에 꽂힌 오래된 시집을 가끔 꺼내어 읽듯, 내 마음 속 소리의 순간들을 소중히 품고 꺼내어 부르고 싶다. 앞으로도 나는 그날처럼 소리로 살아가리라. 전영애 교수님의 목소리, 낭송되는 시, 그리고 모두의 노래가 하나로 이어졌던 그날처럼, 내 목소리도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주는 작은 열쇠가 되길 바란다. 그날의 합창은 내 안의 오래된 소리를 깨웠고, 지금도 그 여운에 깊이 잠겨 있다. 노래가 있는 삶은 언제나 나를 빛나게 해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묻는다. “지금, 다시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참고자료
괴테의 시 Heidenröslein 하이덴뢰슬라인 '들에 핀 장미' 전영애 교수님 해설을 여백서원에서 2025.5.31.월
https://youtu.be/MxUKbq4JLlg?si=b8s8IcN1xracTo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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