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자들을 이주시켜라

서울 강남개발

by 써니사이드업
강남개발 이전의 반포동과 잠원동 일대_서울역사박물관_제1유형_20251018.jpg 강남개발 이전의 잠원동과 반포동 일대. 가운데에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중산층의 선택-아파트

강남은 1963년에 서울에 편입되었지만, 본격적인 개발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의도, 이촌동, 반포, 잠실에 이어 압구정동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강남은 점차 서울의 새로운 주거지로 떠올랐습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전경 1977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위치가 좋고 땅값도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곳의 아파트는 저소득층보다는 중산층과 부유층을 겨냥해 지어졌습니다. 광고에서는 중앙난방, 엘리베이터, 넓은 평형 같은 요소가 강조됐고, 생활 편의시설과 현대적인 설계가 돋보였죠. 1970년대 후반은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전환점이었어요. 정부가 주도하고, 대기업이 공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중산층과 부유층이 받아들이면서 한국 아파트 신화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 1980년에 정부의 강남개발시책에 따라 서초동으로 이전하였다. 평준화 전에는 경기고에 버금가는 최고 명문고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사람들을 강남으로 이주시켜라

하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한강 이남은 여전히 낯설고 기반 시설도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서울시는 강남 개발을 유도하기 위해 ‘강북 억제 정책’을 펼쳤습니다. 종로와 중구 일대에는 백화점, 시장, 유흥업소는 물론 일반 음식점조차 새로 허가해주지 않았어요. 강북에 생활 기반시설이 들어서지 않도록 해 인구가 더 늘지 않게 막았던 겁니다.



옛 경기고등학교인 정독도서관. 경기고등학교의 강남이전은 졸업생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정부는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설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동시에 사람들을 강남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문 학교 이전’이었어요.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같은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들이 하나둘 강남으로 옮겨갔죠. 교육을 무엇보다 중시하던 중산층과 부유층 가족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이야말로 강남 개발의 핵심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반포 주공아파트 1978년. 이 당시에는 수영장이나 테니스장 등의 시설이 중산층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단지형 아파트의 등장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에는 ‘단지형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단지형 아파트는 내부에 상가, 체육시설, 놀이터 같은 생활 인프라가 함께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 도시 기반이 부족하더라도 자족적인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단기간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고, 효율적인 주거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부 입장에서도 선호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의 도시 주거 형식은 점점 아파트 일변도로 굳어졌고, 도시 경관과 공동체 문화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전국 땅값 일람표 (여성중앙 별책부록 1973년 6월호)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부동산 투기의 시작

강남 개발은 곧 부동산 투기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1969년 한남대교가 완공되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강남 땅값은 치솟았어요. 다리 공사가 시작되기 전 평당 200원이던 땅값은 1년 만에 3,000원이 되었고, 고속도로 개통 후에는 10,000원을 훌쩍 넘었죠.

이 시기에 서울시장과 도시계획과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강남을 둘러본 뒤, 청와대 고위 인사들이 강남땅을 차명으로 매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 땅값은 단 1년 만에 수십억 원의 차익을 남겼고, 이 돈은 정치 자금으로 흘러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복부인(임권택 감독) 1980년. 왼쪽부터 박원숙, 김애경, 한혜숙 배우.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

‘복부인'과 아파트 청약 열풍

1970년대에 ‘복부인’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부동산 투기에 나선 고위층 가족, 특히 여성들을 가리킨 표현이었죠. 아파트 분양 현장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섰고, 일부는 핸드백에 현금을 넣어 다니며 청약에 나섰습니다. 정부가 도로와 기반 시설을 먼저 깔아준 뒤 개발 정보를 공개하자, 민간 자본이 몰려들며 투기 수요는 더 거세졌습니다. 강남은 점점 권력자와 투기꾼들의 주 무대로 변해갔던 거예요.


서울시가 건설한 중산층 아파트는 평균 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은행알에 숫자를 기입하여 추첨하는 모습이다. 1970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아파트, 거주 수단이 아닌 투자 수단으로

1970년대부터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 수단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투자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선분양 제도가 도입되면서 아파트는 투기의 주요 대상으로 떠올랐고, 강남 지역 재건축 열풍은 아파트 가격을 하늘 높이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좋은 학군 = 높은 집값”이라는 공식은 강남 아파트를 부와 성공의 상징으로 만들며, 교육과 부동산 시장을 하나로 묶어 놓았죠.


원래 서양에서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은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었어요. 프랑스의 사례만 보아도 1950~60년대에는 젊은 중간 계급이 아파트에 거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독주택으로 옮겨 갔죠. 결국 아파트는 저소득층의 주거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반대였어요. 상위 계층이 먼저 아파트를 선택했고, 이후 하위 계층까지 확산되면서 모든 계층이 아파트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집값을 크게 올렸고, 내 집 마련의 꿈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동시에 이런 불균형은 사회적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강남 개발은 새로운 도시의 탄생일뿐 아니라, 교육과 부동산, 권력과 투기가 한데 얽혀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복잡한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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