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YH 무역 노동자 강제진압 사건

by 써니사이드업

1979년 여름에 서울 을지로의 신민당사에는 절박한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중소기업 YH무역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었죠. 회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문을 닫아버리자,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어요. 고용 승계와 생계 대책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침묵뿐이었습니다. 마지막 희망으로 그들이 발걸음을 옮긴 곳이 바로 야당 신민당사였던 거예요.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당시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유신헌법 아래 대통령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고, 국민들의 불만은 곳곳에서 쌓여가고 있었죠. 경제는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고, 야당은 민심을 담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어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 상황을 민주주의 문제로 보았고, 신민당사에 여공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정권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노동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8월 11일에 신민당사에 경찰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여공들은 무자비하게 끌려 나왔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한 명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권의 폭력성과 민주주의 억압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 (출처: 네이버 이미지)

정권은 사건의 책임을 김영삼에게 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죠. 그러던 중 김영삼은 9월 12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는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이 발언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정권은 더욱 강경한 대응을 선택하게 되었지요.

결국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했습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사례였어요. 사실상 야당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였지만, 국민들에게는 독재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원직에서 제명된 직후, 김영삼은 짧지만 강렬한 성명을 남겼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아무리 권력이 진실을 억누르고 민심을 짓밟으려 해도, 새로운 시대는 반드시 열린다는 선언이었지요. 이 말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며 민주주의 열망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남았습니다.


마산 시내에 진입하는 공수부대 1979년 (출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정권은 끝내 민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는 곧 ‘부마항쟁’으로 확산되었습니. 특히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나서면서 반독재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정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깊어졌고, 마침내 불과 22일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YH 사건은 노동자들의 농성으로 시작되었지만, 부마항쟁과 10·26 사태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흐름을 촉발한 불씨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 문제와 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맞닿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전 19화18 근대화의 주역이 된 여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