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빨리빨리, 서열문화 등
1960~70년대에 한국은 눈부신 산업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는 세계가 주목할 만큼 빨랐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빠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사회 분위기가 깊이 깔려 있었어요.
당시 한국 사회는 무엇보다 “경제를 반드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움직였고, 그 중심에는 강한 민족주의가 있었죠. 박정희 정부는 “외세에 기대지 않고, 우리 힘으로 잘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경제 개발은 생계 문제일 뿐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시대였던 거예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문화가 바로 ‘빨리빨리’였습니다. 느려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모든 일이 속도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생산성은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조급함은 능력처럼 여겨졌지요. 사람들은 늘 바쁘게 움직였고, 여유는 사치로 보였던 거예요.
조직 안에서도 질서와 위계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상하관계가 분명해야 했고, 상급자의 지시는 곧 법처럼 여겨졌습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이었고,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따르는 것이 미덕이었지요. 여기에 군사문화가 더해지며 위계질서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만큼, 정부와 공공기관 곳곳에는 군 출신 인사들이 자리했고, 이들은 군대식 명령 체계를 사회 전반에 퍼뜨렸습니다.
교육 역시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창의적 사고보다, 정해진 지식을 신속하게 습득해 산업 현장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죠. 그래서 학교 교육은 주입식으로 이루어졌고, 학생들은 비판적 사고나 토론보다는 암기와 반복 학습에 익숙해졌습니다. 다양성과 자율성보다는 표준화와 규율이 강조되던 시기였던 거예요.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전통문화는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지만, 마을의 성황당이나 사당 같은 전통 신앙의 흔적은 ‘미신’으로 낙인찍히며 사라져 갔습니다. 음력 명절이 양력 중심으로 바뀌었고, 한때 설날조차 공휴일에서 제외되기도 했죠. 전통은 낡은 것으로, 서구 문물은 따라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 갔습니다. 고궁의 담장은 허물어져 도로가 되었고, 종묘 앞 빈터에는 국회의사당을 세우려는 계획까지 논의되었지요. 역사적 가치보다 실용성이 우선이었고,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문화유산이 사라졌습니다.
자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천은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도심의 녹지는 공원보다는 건물 부지로 여겨졌습니다. 남산처럼 역사성과 상징성을 가진 공간조차 개발 압력 앞에서는 보호받지 못했지요. 자연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하고 정리해야 할 자원으로 여겨졌고, 효율과 성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흐름은 단순히 산업화의 부산물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져 온 사회 구조와 사고방식의 연장선에 있었던 거예요. 위계적 질서, 전통의 배제, 개발 중심의 사고방식―이런 것들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 성장의 그림자 속에는 비판 없이 이어받은 일제의 흔적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