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슬픔을 이야기하자. 함께 기억하고 싶어.
처음 누군가 책 제목에 대해 말해줬을 때 되물었다.
'뭐라고? 왱왱이가 거기 있다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제목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아이에게 그 책이 어디있냐고 물을 때, '그거 있잖아 <왝왝이는 없다> 맞나?'
'<왝왝이는 거기 없었다> 어딨어?' 그러면 아이는 매번 정정해주었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야. 있었는데 왜 자꾸 없다고 해?'
그랬나? 싶어서 제목을 재확인하면 '있었다.'가 맞았다.요녀석... 다소 무거운 이야기인데 아이도 나름 집중해서 읽은것 같다. 관심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충 말하고 잘 까먹는 녀석인데, 이렇게 엄마의 짧은 기억을 일일이 정정해주는거 보면.
세월호 사건이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세월호 뿐 아니라, 최근 빈번했던 많은 사람이 참사로 죽었던 일들이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이다.
주인공 연서가 사고 피해자이자 생존자 였음을 알기 전까지는 연서는 보통의 적당히 반항기 있고, 회의적이고, 무기력한 십대처럼 보였다. 회의적이고 무기력한 부분이 좀 더 강한. 보통의 십대는 반항기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어두운 밤 하수구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갔다가 다시 왝왝이를 찾아나서는 연서를 보고 그 때부터 이미 슬펐다. 어디에도 말할 곳이 없는 아이. 기댈 데도 없고 기대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 잘 살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슬프고 외로운 아이. 실제로 왝왝이에게 말을 건네는 연서를 봤다면, 마치 파란하늘 바라보듯 별이 뜬 밤하늘 바라보듯 그렇게 하수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그 아이를 보았다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는 절친에 대한 판타지가 너무 심하다고 한다. 누구나 친구가 있고 그 친구와 추억을 만들고 행복한 일상을 나누고 그런게 모든 드라마와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보여지는걸 보고 있자면 일상의 당연한 행복을 박탈당한 느낌이 들어 사람들이 더 드러내지 못하고 속상해한다고. 실제로 내 속 마음을 털어놓고 고민을 공유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몇 명이나 될까. 연서는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있고 주위의 어른들도 걱정해주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속시원히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 괜찮지 않으면 걱정을 끼치고, 괜찮다고 하면 믿지 않는다. 오히려 연서에게 가장 편한 상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걱정하고 배려하는게 아니라 같이 생각없이 놀 수 있는 혜지이다.
'너는 이런 내 마음 몰라.'라는 진부한 말은 누구에게나 진실이라서 진부하다. 내가 아닌 누구도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경험해서 인식한 나의 내면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가 있을지라도 인식의 주체가 다르기에 같을 수 없다.
언뜻 보기에 연서는 냉담하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지내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다. 그건 회피에 가깝다는걸. 그렇게 외면하고 살다보면 무뎌지겠지만 치유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소설의 세계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연서가 어쩔수 없이 대면하게 되는 세계가 말을 건낼 테니까. 있는데, 있다는걸 외면하고 잊고 살아가는건 어른들과 제 3자뿐이 아니다. 연서 스스로도 잊었다. 거기 분명히 있는데. 거기에 있는 왝왝이를 발견하고 연서는 혼자 찾고, 같이 있어주고자 한다. 아마 거기까지가 연서가 왝왝이를 만나면서 기대하는 바였을 것이다. 연서는 결국 왝왝이를 데려오고자 한다. 왜냐하면 고양이를 이미 잃었기 때문에. 나만 알고 소중하게 대하던 고양이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나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있었다는걸 사람들은 알까? 어떻게 기억하게 해주지? 그 본능적인 두려움에 친구와 다큐를 상영해서 추모하게 된다. 아마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거다. 계속해서 사고를 잊지 말자고, 추모식을 열고, 추모단상을 창고에서 꺼내고. 목소리내고. 모임을 만들고. 그 전까지는 연서는 연대가 가진 힘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고양이와의 이별을 통해 그 의미를 깨닫는다. 그리고 왝왝이의 세계로 넘어가려고 했던, 잊혀지고 싶었던 연서는 반대로 왝왝이를 세상 밖으로 꺼내오고자 한다.
이 글을 쓰기 전, 내 아이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었다.급우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고 아이는 학교에서도 혼나고, 집에서도 혼나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친구들로부터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질시를 받았을까? ‘괜찮아 앞으로 안그러면 되지.’ 위로를 받았을까? 알 수없다. 처음에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했고 학교에서 온 전화를 통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히 반성의 표현을 했고 눈물의 반성문을 쓰고 가족에게 뼈아픈 후회를 표현했다. 하지만 끝의 끝까지 아이를 가르쳤다고 확신하고 싶은 엄마의 욕심일까? 아이의 내면까지 알고 싶었지만 그 이후로 그 일에 대해 다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 이후 당사자 아이와는 관계가 어찌 됐는지,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 일이 아이에겐 분노였을까, 부끄러움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슬픔이었을까? 내 아이의 마음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남자 아이를 키우면서 자주 느끼게 되는건, 아이가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걸 정말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도 그저 잘못한 것과 잘한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어릴때부터 내가 아이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꾸 묻고, 편안하게 내 마음을 알려주고 했어야 했는데. 나 스스로도 내 감정상태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 나누는 대화에 서툴러서 쉽게 되지 않았다. 그저 내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더 명확한 어휘를 사용할 수 있고, 보통은 그런 감정상태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떻게 협조해줬으면 좋겠는지 목적있는 대화를 할 뿐이다.
어린 남자 아이는 무엇이 재미있었는지, 누구와 놀았는지 정도만 단순하게 이야기한다. 그나마도 나와 관계되지 않은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집에서 얘기조차 하지 않는다. 분명 관찰하면서 본인도 감정이나 생각에 영향을 받는게 틀림없는데도 막연한 기분만 존재할뿐 외부환경에서 벌어진 일들과 자신의 마음상태를 연결짓지 조차 못한다. 만일 어릴때 내가 좀 더 감수성 있는 부모로서 감정을 표현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따뜻한 대화를 자주 나누는 사람이었다면 감정 표현에 있어서 좀 더 자유로운 아이로 키울 수 있었을까?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의 불편함. 나의 감정이 온전히 이해받지못할 거라는 불신. 나도 내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함에서오는 막막함. 비단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나도 그렇다. 특히 우리 사회는 부정적 감정에 대해 처리하고 공유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때문이기도 하고, 부정적 감정을 표출했을 때, 집단에서 배척되거나 불편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특징과 별개로 우리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런 감정을 받아들여주고 감싸안아주는 작은 사회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집에도 왝왝이가 있을 것이다. 큰 사건에 대한 큰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읽어도 되나 싶지만... 누구나 가슴에 담은 슬픔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 되어지지 않고 나눌수 없어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슬픔이 있다면 이야기해 나누자. 너의 마음에 담고 담아 쌓이다 어느날 마음을 너무 써버려 끝내 무너지지 않도록.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너의 왝왝이는 그곳에 있니?
"다른 사람들이 기억해준다면 나는 잊을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것 같았다. 반대로,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것 같았다. 나로부터 시작된 기억은 점차 퍼져나갈 수 있을것 같았다. 모두가 기억하는 날, 나는 비로소 간간히 잊을 수 있을것 같았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025. 이로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