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주택 ; 아이도 어른을 키운다.

아이가 온전히 이해받는 또 다른 세상의 판타지

by 돌배씨


아이가 초등 고학년이 된 이후로는 책은 본인이 고르게 하는 편이었다. 대단한 철학이 있었다기보다는 도서관 연령별 권장도서, 사서 추천 도서, 학교 추천 필독도서 등을 검색해 책을 권해 본들 대체로 손도 대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고르겠다고 강하게 거부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삼 년이 흐르고 어느 날은 늘 읽던 시리즈물이 아닌 단행본에 관심을 보이더니 정초엽 소설에 재미를 느끼면서 단행본 소설도 몇 권 시도해보곤 했다. 드디어 글밥 있는 장편 책들도 읽힐 수 있게 된 건가?! 하고 세계고전문학이나 좀 어려울 법한 책들도 권해 보았더니 또 간섭한다 느꼈는지 다시 추천을 차단했다. 그래서 청소년 문학에서 인기 있다는 책 몇 권을 골라 일단 책장에 꽂아 두었지만 먼지만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순례주택’을 먼저 집어든 것은 나였다. 아이에게 좋은 책이라고 권하거나, 어릴 때 읽었을 때 좋은 책이었다고 회상하기만 했지, 추천한 책을 내가 먼저 읽어보고 건넨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책을 집어든 나는 밥 때도 잊고, 잠도 미뤄가며 재미있게 멈추지 않고 쭉 읽었다. 베스트셀러였고, 청소년문학이었고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일단 재밌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에게 ‘이 책 진짜 재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딱 읽었네!‘라고 말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 책은 아이의 책상에서 침대 머리맡으로, 소파 어느께로 이동하며 아이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그때 알았다. 진짜 재미있게 읽은 즐거움 가득한 내 표정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진정성 있는 추천 사였다는 걸.


getImage (1).png [ 출처 : visitseoul.net ]


< 기본 정보 >

제목 : 순례주택 / 작가 : 유은실 / 출판사 : 비룡소

주요 등장인물 :

- 오수림 (중3) 거북동 원더그랜디움 103동에 사는 독립적인 소녀. 같이 사는 부모보다 외조부와 외조부의 연인인 순례 씨와 더 많이 살았고 가족처럼 느낀다.

- 순례 씨 (75세) 순례주택의 건물주. 세신사로 모은 돈으로 연립주택을 매입한 후로는 거북마을 주민들에게 싸게 세를 준다. 201호 박승갑과 연인이었으며 그의 외손녀인 수림을 함께 키웠다. 하지만 할머니라고 불리는 대신 순례 씨라고 부르게 한다. 수림이와는 서로 '최측근' 사이.

- 박영지 (43세) 수림 엄마. 박승갑의 딸. 전업주부. 몸도 마음도 약해 산후우울증이 오자, 둘째인 수림의 육아를 친정아버지에게 맡기고, 아버지가 분양받은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부부가 모두 생활력이 없어 친정아버지의 벌이에 의존한다. 뉴스에서 아파트와 빌라 주민들의 급을 나누면서 '빌라거지' 발언을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가 거북마을 사람들의 공공연한 빌런이 된다.


줄거리 : 순례주택 건물주, 순례 씨의 최측근 오수림은 학교에서 성적은 높지 않지만 '낙천적이고 성숙함. 생활지능이 높아 세상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는 담임의 평가를 받을 만큼 강하고 독립적이고 중3소녀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인 아빠. 엄마. 언니 오미림은 그녀와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의존적이고 연약해서, 세상을 직접 부딪히지 않고 방어적이고 안전한 편견으로 대하는 무례한 사람들이다. 수림이 가족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순례주택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수림은 자기 가족들을 부끄러워하지만, 연민하기도 한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된 가족들에게 순례 씨가 순례주택에 보증금 없이 세 들 수 있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감사해하며 도움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출한다. 수림의 최측근인 순례 씨는 수림을 따뜻하게 환하게 자라게 해 주었고 어른이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지고, 수림은 부모를 구조해 보려 줄자를 펼쳐든다. 과연 수림의 부모님은 철들 수 있을까?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수림이를 키운 참 어른, 순례 씨는 힘들게 번 돈으로 갖게 된 순례주택을 인생을 자랑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때를 밀어 선생님의 두 배 정도 되는 봉급을 벌었지만 돈을 번 과정이 자랑스럽지 않아서 결과를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해 이웃, 친구와 나누고 베푼다. 그리고 수림이가 가난해진 순간, 위기를 맞은 가족 중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어른에 가까운 사람이 수림이라는 걸 알려준다. 빈 201호를 새치기해 세 줌으로써 수림이가 순례주택에 머무를 수 있게 하고, 수림의 가족들을 구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순례 씨로 인해 수림이는 가족들이 부끄러워 자꾸 작아지다가도 내가 어른을 향해 잘 자라고 있고, 야무지고, 가족을 구조하는 구원투수 역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 아빠랑 있을 때는 좀 모지라고, 1군에 포함되지 못하는 2군 선수이고, 애착이 잘못된 남의 식구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순례주택에서 온전히 인정받고 받아들여졌기에 수림은 부모도 이 안에서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주인공 수림이를 보며 어린 시절 친구 무리에서 겉도는 나, 가족 중에서도 혼자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나, 그리고 생각대로 마음대로 했다가 혼났던 서툴었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문득 어느 한 때, 내 아이의 질문이 떠올랐다. '엄마는 무슨 게임을 좋아해?' '엄마는 뭐 하고 놀고 싶어?' 그때는 정말로 내 취향이 궁금해서 그런 줄 알고, ‘엄만 게임 안 좋아해. 책 읽거나 드라마 보는 게 좋아.’라고 답했는데 듣고 싶던 대답이 아니었던 듯 아이는 여러 번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하곤 했었다.

아마 아이는 게임을 좋아하는 스스로가, 친구랑 많이 놀고 싶은 스스로가 너무 가족들과 다른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도 분명 아이였던 적이 있는데, 육아서에서 발달과정과 아동심리 이론을 배워도, 살면서 그런 질문을 마주했을 때,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참 쉬운 일이 아니구나. 나는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는 순간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그때의 기억이 몰려오면서 그때서야 내가 키우는 아이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빌라촌에 대해서 뭐 틀린 소리 했어?

수림 엄마의 대표 대사, ‘솔직히 말해서’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의 여전히 좀 더 자라야 할 수많은 어른들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말해서’라는 껍데기를 씌우고 상대를 상처 입힐 권리를 획득한 듯 말하고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라는 꼬리로 남을 상처 입히고 따라오는 은근한 죄책감마저 희석한다. 나도 언젠가 아이에게 '사실은' '남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와 같은 말로 아이에게 현실을 가르쳐준다며 허락 없이 상처 주는 말들을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이는 그런 말을 처음 들을 때, 왜 내 마음을 상대방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서운하고 아팠을 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 상처에 딱쟁이가 앉은 후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여유 없음이, 무언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불안으로 잔뜩 날 선 신경질임을 알게 되고 딱하게 보게 될 거다. 어른이 딱해 보이는 순간, 아이는 자신이 훌쩍 자랐다고 느끼면서 나는 누굴 보며 자라나하는 막막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다행히 순례 씨의 너른 그릇에서 자라난 수림이는 그때 엄마를 어떻게 철들게 하나 하는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가난해지는 건 창피하지 않다. 1군들을 데리고 순례 주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창피하다."

"나는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순례 씨 말이 맞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나는 인격적으로 대해야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순례자니까. 관광객이 아니라."

수림이는 1군들을(아빠. 엄마. 미림이) 부끄러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감사해한다. 엄마가 목숨 걸고 자신을 낳아줘서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해 주었으므로. 그리고 순례주택 이웃들과 엄마 아빠를 철들게 하려고 소소한 복수를 곁들여 단체로 뻥을 치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먹혔지만 이에 대해서도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그게 누구라도 인격적으로 대했어야 한다는 반성을 한다. 그 나잇대의 도덕심은 때로 너무나 순수해서 지엽으로 본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른은 왜 자꾸 때 묻은 거울을 아이에게 들이대면서 빨리 어른이 돼라 재촉하는지...


아이와 함께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감상을 공유하고 이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눠보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가 책을 완독하고 ‘어떻게 읽었어? 어디가 좋았어?’ 등의 질문으로 감상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뭔가 정답이라도 요구받은 듯 부담스러워하길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아이 책장에 꽂힌 다른 책을 내가 읽고 있을 때, 아이가 나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그 책은 어때? 재밌어?”

“(옳지 지금이다!) 어어 재밌어. 근데 저번에 읽은 순례주택이랑은 좀 달라. 그땐 엄청 재밌었는데 이건 좀 슬퍼.”

슬쩍 이전책에 대한 감상을 끼워 넣어 대답하니 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 난 순례주택 재밌긴 했는데 결말이 좀….”

“(걸렸다!!) 어? 왜? 결말이 맘에 안 들었어? 넌 어디가 제일 좋았는데?"

"난, 수림이 친구 진하가 항상 순례주택 사람들에게 못된 말 한 엄마한테 소금뿌리고 통쾌해할 때가 제일 재밌었지."

"오 거기 사이다지! 근데 결말은 어땠는데?"

"좀... 답답했어."

여기서부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궁금하면 drag!!)


결말에서 수림의 엄마 아빠는 수림이가 순례주택을 상속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맘에도 없이 이웃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성실하게 살아 보인다. 그러다 수림과 순례주택 주민들이 속인걸 안 순례 씨가 순례주택은 국경 없는 의사회에게 상속되도록 유언장을 써놨다는 사실을 밝힌다. 아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엄마는 어쩐지 바뀐 상태 그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가족을 제외한 빌라 모두에게 불친절하던 엄마는 처음으로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그게 수림은 어쩐지 싫지 않았다. 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아직 사이다가 더 좋은 나이. 나와 맞지 않고 갑갑한 가족들이 마법처럼 변화하거나, 나와 꼭 맞는 세계를 찾아 떠나거나 하는 게 내 어린 시절에도 가장 바라던 판타지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빨간 머리 앤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해리 포터를 봤던 그 시절의 독서가 기억났고, 아이의 감상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성공!! "에이, 결말의 의미를 좀 더 곱씹어봐. 꽉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결말은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니까."라는 꼰대적 감상을 아이 앞에서 입밖에 내지 않은 것. ㅎㅎ 그렇게 나는 청소년문학의 매력에 다시 퐁당 빠져들었고. 아이의 마음을 다시 엿보고 그때 그 마음을 떠올리는 기쁨을 배웠다. 그렇게 조금 청소년 학부모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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