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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Nov 30. 2021

40년 만에 다시 드는 붓

붓글씨 수업이 중간 정도 지나고 있었을까.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숨으로 강의장에 들어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노트북 가방 사이즈만 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시고 얼룩덜룩한 카라가 있는 옷깃은 단추 하나 정도 풀어진 매무새가 급하게 뛰어온 것처럼 정돈된 것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무슨 일일까. 어떻게 오셨을까. 누굴 찾으시나.


"여기 한글 서예 배우는 데 맞지요?"


번지수는 제대로 찾아오셨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참 많이 하셨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넋 놓고 들어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선생님 조차도 그럴 처지가 못됐다. 수강생이 계속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두어시간 안에 사람들의 글씨를 봐주고 새로운 체본을 써줘야 하는 일이 구만리 같았겠지. 아침 일찍 강의 전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체본을 받았고 마음이 그렇게 분주하지 않았다. 내 앞자리는 비었고 그분을 앞자리에 앉게 안내했다.


가방에서 나올 물건들은 뻔했다. 붓, 먹, 벼루, 종이, 교본. 그런데 대단한 것들이었다. 모양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쓰였을 시기가 내가 세 살 때 것들이었다. 어르신은 본인의 나이를 여든하나라고 하셨다. 그럼 마흔하나였을 때 사용했던 물건아닌가 말이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한문 서예를 사사하셨다고 했다. 그리곤 이래저래 살다보니 그만뒀고 그 물건들을 4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다시 풀어본다 말씀하신다. 그러니 하실 말씀이 많았을 수밖에 없겠다.


어르신을 여든하나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이셨고 실제로 그러신 것 같았다. '내가 이거 배우려고 몸은 잘 관리했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그런건가. 붓은 가방에서 나오자마자 머리 부분이 쑤욱 빠졌다. 머리 부분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망치로 치면 바스러질 정도로 붓모는 삭아 있었다. 벼루는 손바닥만 한데 저걸로 어떻게 한문을 배우셨지 의문은 들었다. 먹은 전체 길이에 3분의 1만 남아 손끝으로 잡아야했다. 종이는 꽤 쓸만했다. 교본을 슬쩍 들춰보니 배운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어서 어르신의 말씀에 신빙성을 더했다.


붓을 여분으로 가져오신 분의 것을 빌린 후 강의장에 준비되어 있는 벼루를 가져다 드리고 숨을 돌리시는 동안 물을 채워 먹을 갈아드렸다. 아침나절 뭘 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다가 오늘 수업 있는 걸 깜박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있는 가방을 그냥 가지고 나왔다며 거침 숨을 몰아쉬며 말씀하셨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아이고 우째요. 등등. "괜찮아요. 전 정말 괜찮아요.이제라도 나오셨으니 다행이에요." 내가 어르신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정말 잘 나오셨다고 이제라도 붓을 다시 잡으셔서 참 다행이라고 진심을 전했다.


선생님은 거침이 없으시다. 꼴지로 들어오신 어르신을 수강생들이 다 떠난 그 텅빈 곳에서 앉혀 놓고는 내가 처음 선생님께 지도 받을 때 그대로 말씀하시며 정성을 다하신다. 40년 전 한문 서예를 쓰신 경험이 있으시니 그 부분을 존중하여 가로획 세로획 긋는 것을 뛰어넘어 가로세로 획이 들어간 가장 기본적인 글자를 체본으로 쓰시고 추가 설명을 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체본을 글자로 받는 것도 글자에 깃든 정신에 대한 의미를 짚어보는 것도 과분하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신다. 난 시간이 없어서 거기 까지만 보고 강의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르신이 다음주 수업에도 나오실 수 있을까. 아주 조용히 유유히 수려한 글솜씨를 자랑하는 강의장 곳곳의 어르신들과는 달리 정신없고 거친 숨을 내쉬고 짙은 인상을 갖고 계시는 그분을 다음주 수업에 또 뵐 수 있을까.


2019년 7월 어느 더운 여름날. 어르신들 앞에서 붓글씨를 배우러 왔다며 고개숙여 자기소개를 했던 내 수줍은 모습이 생각났다. 벌써 2년 4개월 정도 되어가는 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제 얼추 이해하고 따라할 정도는 되었으나 나의 글씨를 쓰는 것은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선생님은 오늘 나에게 쓴소리를 하셨다. 언제까지 낱글자만 쓸 거냐고... 모두에게 하시는 잔소리지만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문장으로 글자의 배열을 맞추고 낱글자로 배운 쉬운 글자와 어려운 글자의 쓰임을 공간에서 확인할 때 실력이 는다는 말씀이 아주 조금 알 듯도한데.


다른 것들에 정신을 쏟고 있어서 붓글씨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오늘 40년 만에 나타나 붓글씨를 다시 배우겠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 때문에 몸의 감각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매주 수요일은 붓글씨 쓰는 날이었지. 맞아. 난 별일 없으면 늘 이곳에 나와 붓을 들었지. 마음이 없었다면 밥먹듯 빠졌을 테지만 노는 것보다 더 좋은 시간이라며 꾸역꾸역 나왔던 기억이 스친다. 오늘 그걸 깨우쳐준 40년 만에 붓을 드는 어르신께 감사하다. 그리고 다음주에도 꼭 뵐 수 있기를...  (이분은 후에 계속 나오시고 계시다.)




#우연은가끔정수리를찍을때가있다

#아얏아얏깨어나야지

#붓글씨에대한글들을찾아보자

#내마음이어땠는지기록으로남아있질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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