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학교에 가고 꼬맹이까지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아이들이 만지작거렸던 장난감이며 책이며 모두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안해 보인다. 날이 좋았던 어제, 유독 꼬맹이 책상 위에 볕이 들어 플라스틱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 넣듯 반짝거렸다. 꼬맹이의 관심사는 오빠의 것과 많이 닮아있다. 아이언맨, 캐리비안의 해적, 스타워즈 등에 나오는 레고 캐릭터와 알수없는 악당 군사들까지 오빠에게서 빼앗은 갖가지 장난감이 놀이를 한창 진행하던 중 정지된 채 쉬고 있다. 곳곳에 보이는 종이접기도 놀이에 꼭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책상에 빛이 들어와 성의 별을 빛나게 하니 마치 마법이 풀려 자유를 만끽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현실과 환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거구나 싶었다.
첫째, 아들 위주의 생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부인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에 꼬맹이, 딸은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그것들을 이용해 역할 놀이를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나이의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아이스크림 가게 놀이를 하자며 졸라대도 기껏 두어번 하면 기운이 떨어져 풀썩 주저앉게 된다. 놀아준다고 생각하니 힘들고 지루한 것도 마인드를 바꿔 '나도 같이 놀자' 생각하니 기운이 좀 생기는 것 같다. 첫째 때는 아이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준답시고 여러가지로 놀이를 연구하고 놀아줬던 반면 그에 반도 못되는 열정으로 딸 아이를 대하고 있으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며칠 전에 산책을 하던 중에 주워 온 나뭇잎을 이용해 물감 놀이를 했었는데 아이의 반응이 꽤나 괜찮았다. 지천에 널린 것이 낙엽이고 생태 미술 재료인데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로 놀아주자는 생각에 미치게 됐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아이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것 마저 빼앗겼다. 놀아줄 수 있는 건 엄마밖에 없는데 이래저래 꽁무니를 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나도 참...
그래서 오늘은 낙엽을 주우러 아니 미술 놀이를 할만 한 잎맥이 굵은 나뭇잎을 찾아 근처 숲공원을 찾았다. 도서관에 들려 책을 대출하고는 바로 뒤에 있는 공원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다가오면 마스크를 쓰고 멀어져 가면 벗어가며 숨을 크게 들이마쉬고 내쉬고 소소한 놀이도 해가며 시간을 즐겼다. 나무로 만든 작은 놀이터에 들려 오르락 내리락, 아이는 재미있단다. 그걸로 됐다. 숲에 조그맣게 나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뭉게구름도 본다. '엄마, 저 구름 있잖아. 엄마가 아이를 안아주고 있는 것 같아.' 아이의 말이 예뻐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줬다. 숲은 금방 어두워졌다.
저녁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저녁을 준비하고 먹은 저녁 상을 치우고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조금 앉아 있으려니 아까 주워온 나뭇잎이 생각났다. '물감놀이 할까?' 물으니 신나서 뛰는 꼬맹이. 조금씩 사서 모아둔 아크릴 물감이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나뭇잎 뒷면에 잎맥이 불거진 면에 원하는 색깔을 칠하고 아크릴 물감이 마르기 전에 종이에 찍으면 훌륭한 그림이 된다. 이번에는 다양한 색깔의 색종이에 나뭇잎을 찍어내고 그걸 일렬로 연결시켜 색깔의 대비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물감이 손에 묻으면 질색을 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여러번의 물감 놀이를 통해 조금은 수월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물감놀이, 만들기, 그리기 활동을 한 하루는 풍성하고 든든하다. 아이도 함께 즐겨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매일 책 한 권 이상을 읽어주는 것이며 그림으로 놀아주는 것이며 특별한 일 없이 그냥 걷는 산책일지라도 무언가 함께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 뿐만 아니라 엄마인 나도 마음이 풍성해진다는 걸 새삼 느낄수 있었던 하루였다.
가을이다. 갖가지 색깔로 단풍진 낙엽이 바닥에 나뒹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아이와 할 활동의 재료라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벌써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무얼 재미나게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