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반에 핸드폰 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 간신히 일어나는 날과는 다르게 정신이 맑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벽에 몸을 누이면 정상적으로 잠을 잘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내야한다. 그런 며칠을 보내고 나니 어제는 눈이 자동으로 감겼고 새벽에 거뜬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거다. 더워서 걷어찬 아이들의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다 배에 올려 주고는 양치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켠다. 오랜만이라 인사하는 것 같다. 책상에 정신없이 널려있는 책들이며 연필이며 붓들이며 것들에 더해 어제 마시다 만 커피잔이 덩그러니 놓여져 더욱 지저분해 보인다.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 김열규 교수의 <공부>, 조정육 작가의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순서대로 읽었다. 책을 읽을 때 꼭 두서너 권을 교차적으로 읽게 되는데 집중이 안될 것 같지만 오히려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내게는 있다 하겠다. 왜 쓰는 일을 권하는지 왜 공부하는 삶을 권하는지 왜 작가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들은 창조적 삶을 선택했는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런 류의 책을 펼치니 마치 내가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삶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맛이 참 좋을 무렵...
남편의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물에 불려 둔 쌀을 씻어 아침밥을 하려 싱크대 앞에 섰다. 아직 6시 45분. 싱크대 선반에 달린 조명을 살짝 켜고 주변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가운데 빛은 감각을 깨우기라도 하듯 모든 것이 나에게 집중되는 듯했다. 쌀을 씻는데 쌀알이 손끝에서 까끌까끌하게 뒹굴며 벌써 굳어버린 감정을 씻어내라 재촉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식들의 원망 속에 사라졌을 수많은 아버지들. 그들이 가엾다.
한성백제문화제 '대백제전' 행사 중 빛축제를 위해 설치한 조명이 멋있을 것 같아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다리 밑에 머물러 있는데 좀처럼 밤에는 전화를 걸지 않는 엄마가 무슨 일인지 전화를 하셨다. 며칠 비도 오고 간만에 한가해졌다며 최근 태어난 큰손주를 보러 왔다가 저녁 먹고 내려가는 길이라며 말씀하셨다. 며칠 전 시골에 갔다가 아빠가 던진 냉랭하고 생각없는 말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시끄러울까 걱정된다는 엄마의 말 대신이었다. 우린 그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매일 해야하는 가족들 끼니 챙기는 일이 버거울 때면 평생 그 일을 했을 엄마가 떠올라 대단하다 생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쌀알 한톨 한톨이 손끝으로 만져지면서 엄마는 수 많은 날들 쌀을 벅벅 씻으면서 아빠의 모진 말들을 얼마나 참아내며 눈물을 삼켰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쉽지 않은 사람. 날씨가 하루에도 여러번 바뀌는 사람. 밖에서는 잘하고 안에서는 그만치 못하는 사람. 자식들에게 위엄은 있지만 다정은 없었던 사람. 엄마를 존중하지 않았던 사람. 많이 좋아졌다 말하지만 여전히 그런 모습에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 우리 아빠. 아빠의 그런 모습에 가족들이 힘들까봐 쌀을 씻는 기분으로 한톨한톨 일일이 어루만졌을 엄마.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끓이는데 재료를 손질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컥하고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기도 여러번이다. 그 누구의 말보다 가족이 내게 던진 말은 더 큰 상처를 만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가도 가족이기 때문에 또 보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도 자신의 딸이 어떤 생각의 소유자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 거라 생각했다. 아빠의 말 한마디에 그 믿음이 깨지는 걸 경험하고 나니 아빠 없이 태어난 것처럼 외롭고 허전했다. 난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는 일은 그들의 자녀로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삶의 이유이고 에너지가 된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 그런 가정을 부럽다 여긴다.
아빠도 요즘 속이 시끄러울 거다. 본인 스스로 얼마 남지 않았다 말씀하신다. 이제는 좀 손에 힘을 풀고 놓아줄 법도 한데 얼마 남지 않은 생에 해야 할 게 산더미라며 시간에 쫓기듯 그렇게 일을 하신다. 그 모습을 보는 나머지 가족들은 불편하고 때로는 화가 나고 또 때로는 안타깝다. 평생 내 아빠로 사는 사람.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그리 많지 않은 그의 딸인 나. 아빠를 존경하려 애쓰는 나. 이해하려 노력하는 나. 정말로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나. 아빠는 그런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한동안 다가서다 뒷걸음질 치니까 다시 다가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학창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아빠'를 쓴 적이 있었나. 아빠는 자신을 어떤 아빠로 기억되길 바라는 걸까. 난 그게 궁금하다.
부모의 사랑은 대물림 되는 걸까. 아빠가 네 살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머니의 사랑도 그다지 많이 받고 큰 것 같지 않다. 재산은 큰집에 많이 돌아갔고 아빠는 겨우 살아갈 정도를 얻어 시간을 나왔다고 했다. 사랑 받은 적이 없으니 사랑을 주는 방법도 누굴 따뜻하게 대하는 방법도 어색하기만 한 사람. 이 시대의 마지막 아버지들이길 바란다. 그나저나 내가 걱정이다... 마음이 이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