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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Dec 10. 2021

그래도 해야 하지 않겠냐

<독서>라는 책을 읽고 <공부>라는 책과 <아흔즈음에>라는 책을 두 권 샀다. 책읽기에 대한 사랑과 진지함이 책 전체에 배어 있는 <독서>는 내가 김열규 교수님을 알게 된 너무도 감사한 책이다. 대출한 책이기 때문에 밑줄을 그을 수 없었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아쉬움 때문에 책읽기 후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는 것을 일처럼 했다. 내용을 기억하고 싶어 썼던 글이 아니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이 얼마나 요동쳤는지 그 설레임은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꼭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섰다는 건 참 이상하다. 언제고 읽고 싶어 책을 다시 펼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우린 이미 기억을 기억하여 그것과 한차원 다른 또 다른 감정을 느끼는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흔즈음에>를 읽으며 책읽기의 웅숭깊은 골짜기가 생각나는 건 처음 <독서>를 통해 느꼈던 깊은 울림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명한 느낌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란 생각을 하며 다시 그 감각을 끌어 올려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느낌만으로 어루만진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열규 교수님의 유고작 <아흔즈음에>를 읽으며 그의 생을 기억하고 경험했던 가족과 제자의 추모글을 읽으며 그저 독자로 만나 책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 그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교수님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스승이었으며 무엇보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삶을 살다가신 오롯한 개인이었겠구나. 유고작에서까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념을 느낄 수 있으니 평생을 책과 글쓰기에 진심을 다했던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단단했고 치열했을 지 감히 생각하게 된다.


사실은 어제의 먹통 상태가 오늘도 이어지는 듯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뭐라도 읽을까 하고 집어든 책이다. 뭐라도는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신호 없음을 감지하고 먹통 상태를 깨야 했기에 그 역할을 해줄 무언가 필요했다. 김열규 교수님의 책은 그런 역할을 해줄 것임을 알기에 어디있지 어디있었더라 하며 기어코 찾아내 책장을 넘겼다.



구름이여, 그 오고 감의 자유여. 어느 때 내가 나의 없음을 확인하고 도연히 웃음 지을 것인가.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 가장 첫페이지에 써 있는 이 글귀는 삶의 죽음 앞에서 초연해 질 수 있었던 건 교수님의 치열했던 글쓰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생각으로 끝나는 생각과 글로 옮겨 앉은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누군가는 그런 글쓰기는 나를 옥죄일 거라 하지만 그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나의 글쓰기에 대한 입장은 그렇지 않다.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글로 옮기는 행위는 다짐과 비슷하다. 나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삶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며 괜찮다면 읽는 이들을 그 삶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일일 것이다. 글짓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거라 생각하며...


아직도 먹통 상태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글쓰기로 고민스러웠던 내게 그래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끌어주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뜬구름 잡는 짓이라며 말할 수도 있겠는데... 난 뜬구름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교수님의 글이 절 또 잡아주네요...고맙습니다.




#그래도해야하지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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