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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Dec 08. 2021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이 그림이 된다

꼬맹이와 가붓하게 나간 산책이 길어진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여행을 앞두고 집에서 돌보고 있는데 아이는 것도 모르고 아침밥을 먹자마자 나가자며 졸라대는 거다. 그래그래 나가자. 이것만 하고 나가자. 저것만 하고 나가자. 그래그래 나가자. 이제 나가자. 사실 세수도 안하고 대충 머리를 묶고는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리고 하는 외출이라 멍할 수밖에 없다. 놀이터로 가기 전 카페에 들려 카라멜 라떼와 미지근한 코코아를 사서 손에 들고는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 꼬맹를 졸래졸래 따라가 본다.


놀이터 가운데 놓인 원형 의자에 앉아 짐을 풀고 살짝 더운지 겉옷도 벗어 놓았다. 카페에 아이들을 위한 간식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중 곰돌이 젤리를 1500원에 사서는 에너지가 떨어졌다 말할 때마다 하나씩 넣어준다. 엉덩이를 한껏 뒤로 빼고는 두 손을 양볼에 대고는 '먹고싶다아아' 그러는데 뭐 한번 정도는 '너무 많이 먹으면 안돼' 한다고 해도 질 수밖에 없다. 젤리를 잘 사주지 않는 나로서는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생색도 내본다.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슈웅 타고 내려오고 집에서 하면 시시한 숨바꼭질도 너른 놀이터에서 서너번 해본다. 그네 타는 것을 돕다가 햇살이 너무 따가워 그늘을 찾아 앉았는데 꼬맹이도 목이 마른지 코코아를 빨대로 쪽쪽 빨며 옆에 앉는다. 의자에 앉으면 두 발이 바닥에 닿질 않아 앞으로 뒤로 흔들면서 흥엉거리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참 예쁘다. 집에서는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가도 밖에 나와 넓은 마음으로 아이를 대할 때는 끝도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기말 과제가 떠올라 꼬맹이에게 엄마 좀 찍어 달라며 핸드폰을 건냈다. 목이 날라간 사진 온몸이 흔들려 춤추는 사진 컷은 좋은데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은 사진 등 여러장을 찍었다. 꼬맹이는 나를 나는 꼬맹이를 찍으며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춤을 추기도 하고 의자에 올라가 쿵하고 뛰어 내리기도 하고 온몸을 비틀고 꼬면서 잘도 뛰어다닌다. 꼬맹이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새치 염색을 미뤘더니 잡초처럼 마음대로 자란 머리카락은 지금의 나이보다 다섯살 이상은 나이들어 보이게 만들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새치 염색을 해야겠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제 제법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주워보자고 말했다. 꼬맹이도 그러자며 소매를 걷어 올린다. 그런데 집에 가지고 가서 풀칠하며 놀 것이 아니라 바닥을 도화지로 그 위에 나뭇잎 그림을 그리면 될 일이었다. 생태미술처럼 말이다. 끝이 뾰족한 나뭇잎을 모은 뒤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올리다보면 사자 갈기를 만들 수 있다. 동그란 얼굴에 잣나무의 뾰족한 잎으로 수염을 붙이고 마른 나무로 코와 입을 세우면 그럴듯한 사자 얼굴 완성이다. 꼬맹이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떻게 하냐며 발을 동동구른다. 더 많은 낙엽을 주워서 몸통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본다.





두번째로 만든 건 나뭇잎을 싣고 가는 트럭이었다. 그런데 잎이 긴 강아지풀을 보니 비 내리는 하늘을 표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꼬맹이는 비 맞는 트럭이 못내 걱정이 됐는지 우산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우산을 만들고 우산 위로 비를 옮겼다. '우산을 쓴 나뭇잎 옮기는 트럭' 완성!


이런 놀이를 할 수 있는 건 물론 아빠도 가능하겠지만 아이의 일상을 잔잔히 지켜보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놀이인 듯 아닌 듯 행동할 수 있는 엄마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일에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그들의 행동을 잔잔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건 엄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놀이터 놀이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미술사 수업을 듣는데 인상주의 화가 메리 카사트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 화가 활동은 많지 않았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미술 교육을 받은 후에도 그들이 그릴 수 있는 대상은 일상 생활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메리 카사트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면 있는 그대로의 수수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남편 외에 외부 남성을 그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상이 다른 여성 아니면 아이였다. 엄마 품에서 노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 엄마 주변에 머물며 놀이를 하는 사랑스런 모습,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등 대부분이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A kiss for baby anne, 1897  



Mother and child in a boat, 1909



A goodnight hug, 1880



Children playing with a dog, 1907  



가끔은 고단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하는 건 분명 축복이겠지만 그것이 일상이 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불안 그리고 권태로움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여성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짐짓 추측해 본다. 여성 화가가 그린 여성의 모습과 남성 화가가 그린 여성의 모습은 그 느낌이 참 다르다. 특히 르누아르의 <특별석>에 등장하는 여인만 보더라도 그녀는 화사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메리 카사트의 그림 <오페라 특별석의 검은 옷 입은 여인>에 등장하는 여인은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는 주체로서의 여성과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분명 다르다. 남성은 여성을 수동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여성은 스스로 굉장히 능동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린 그렇게 다르다. 메리 카사트의 엄마와 아이들의 사랑스런 모습과 부드러운 색체도 마음에 들지만 간간히 보여지는 여성의 지적 욕구를 보여주는 그림에서 크게 감동 받았다.


자라는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만이 간직할 수 있는 순간은 메리 카사트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평안하며 때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변할 때도 있지만 그것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놀이터에서 산책로에서 집에서 꼬맹이와 함께한 순간들이 메리 카사트의 그림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아이가 하자는대로 그저 따라다니기만 해도 좋겠구나 싶다.




#엄마만이공유할수있는아름다운순간을포착하다

#메리카사트의그림을보며나의생활이조금은위로받는기분이들었다

#그때도그랬고지금도그렇다

#엄마와아이는공유하는공기가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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