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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Nov 27. 2021

안으로 자라는 엄마, 밖으로 자라는 아이


빨아 놓은 양말이 없었다. 나는 운동화를 240도 신고 245도 신는다. 내 발에 살짝 조이는 양말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조금 크기는 하겠지만 신을만 할 거야. 아들 발에 딱 보기 좋게 맞는다. 기분이 이상하다. 아들의 신발 사이즈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220이었다. 신발이 늘어났나. 그래서 230인데 220 운동화를 여직 신고 있는 건가. 엄마 양말이 맞는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빨아 놓은 양말이 없는 날이면 엄마 양말을 찾아 신고 있다.


오늘은 붓글씨 쓰는 날. 아침 일찍 꼬맹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는 바쁜 걸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밀린 과제를 신경쓰느라 정신없이 살고 있는 요즘 잠을 못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걷고 있는 중에도 정신이 휙휙 돌아다닌다. 정신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자판기 커피 앞에 서서 300원짜리 설탕커피 버튼을 눌렀다. 대학시절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떠올랐다.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자판기 커피. 도서관에 가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신거운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가 항상 있었는데. 지금 정신을 차리려 뽑는 커피는 그 때의 커피에 비하면 써도 너무 쓰다. 그립다. 연못 근처 벤치에 땡땡이 치고 누워 바라보던 하늘이 무척 그립다.


40년만에 붓을 드셨다던 그분은 다행스럽게도 오늘 출석을 제시간에 하셨다. 여전히 분주한 그분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글씨와 씨름하실 게 분명하다. 먹물이며 벼루며 종이 접는 방법을 가르쳐 드렸다. 나와 책상을 나눠쓰는 언니는 오늘 눈매가 또렷하다. 최근에 다시 일을 시작한 언니는 한동안 그 일에 적응하느라 무척 바빴나보다. 이제 좀 적응이 된다며 다시 글씨를 쓰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정신을 차렸다는 언니의 말이 반갑다. 글씨를 써내려 가는데 붓을 놓쳤다.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붓이 오늘 내 정신 상태를 말해주듯 그렇게 나뒹굴었다.


선생님께 체본을 받고 평소에도 일찍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언니와 도서관 앞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에 두 잔 정도의 자판기 커피는 뭐 아직은 괜찮다. 언니는 딸 둘인 맞벌이 부부의 집에서 아이들 등하원을 도와주는 도우미로 일을 하고 있다. 아이도 부모도 언니도 각자 서로에게 적응하는 기간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언니가 일을 하기 전에 세 명의 도우미가 바뀌었고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도우미에게 많이 날카로워져 있었다고 한다. 언니는 본인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처럼 정성으로 아이들을 돌본 것 같다. 이제야 아이들과 대화가 되고 부모와 소통이 되며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며 언니는 밝은 표정으로 커피 한모금을 넘긴다.


무슨 말을 하다가 성장기 아이들의 사춘기 표정에 대해 말이 나왔는데...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눈에 힘이 들어가고 전에 부모와 나눴던 스킨쉽도 거부하게 된다고 했다. 일정 부분 아들에게서 느끼는 것을 언니의 말을 통해 듣게 되니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아이의 세상에서는 아이의 말이 옳다고 말을 이어가며 그 입장을 존중해 주고 가끔은 저주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매일 안고 뽀뽀하고 사랑을 보여줬던 아이들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지만 언니는 언니의 손끝으로 아이와 접촉하며 '이것만' '이렇게는 돼지?' 등의 농담으로 끝까지 그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네 생각은 그렇구나. 그럼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말해줄래. 엄마는 언제나 네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돼 있어. 마지막에 언니가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멤돈다. 마지막까지 엄마만 포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더라구.


붓글씨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붓을 빨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밥솥 뚜껑을 돌리는데 보라색 양말 엄지발가락 부분에 감자가 삐져나왔다. 그냥 두면 구멍이 더 커져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언니의 말을 계속 곱씹고 있던 터라 구멍난 양말로 삐져나오는 발가락이 우리 아이들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외적 성장은 멈추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적 성장에 속이 복잡하다. 아이들은 외적 성장도 내적 성장도 지금 한창 진행중이다. 양말처럼 모양도 크기도 정해져 있는 기성세대인 부모가 자기의 모양대로 크기대로 자녀를 양육한다면 어느날 갑자기 터져버린 양말처럼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아이는 아이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중일 테다. 부모 주도적 양육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아이는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다. 부모가 보기에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매순간 눈에 비치지만 아이의 세상에서는 아이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생각을 존중해줘야 할 것이다. 엄마는 엄마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밖으로 자라지는 않지만 안으로 자라나는 생각들 때문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는 중에 성큼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저들은 더 바쁘겠구나 싶다.


안으로 자라는 엄마는 밖으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세상에 빛이 잘 들도록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면 될 것이다.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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