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줬더니 걷어찼다.
발에 차일 정도로 바닥을 채우고 있는 낙엽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도 잠시. 심술궂은 마음이 올라왔다. 얼마 쌓이지도 않았는데 성가신 걸까. 낙엽이 바닥을 덮어 보도블럭이 아닌 낭만을 밟으며 걷고 싶어하는 도시인들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빗자루로, 바람을 일으키는 청소기로 그것들을 벗겨낸다. 바닥은 깨끗해질 수 있겠지만 잠시라도 가을 풍경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은 이만저만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회는 대립된 입장이 마주하게 되고 시비는 끊이질 않는다. 가을 낙엽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 낙엽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마찰이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맘때가 되면 늘 빚어지는 문제이고 해야 하는 일이 앞선다. 즐기는 건 선택적인 것이고 해야 하는 일은 당위적 입장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가을 낙엽의 정취를 계절 내내 즐기고 싶다면 공원을 찾던가 산으로 가 등산을 선택하던가 그것도 모자라다면 자기 집 앞마당에 단풍 나무를 그득 심어놓으면 될 것이다.
가슴 울렁이게 하는 단풍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이토록 고리타분한 보도블럭을 걷고 있다. 뒤틀어진 심상을 들여다 보는 것도 귀찮았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발로 걷어 차면서 신발 바닥과 시멘 바닥의 마찰로 만들어지는 소리가 거슬려 이내 멈춰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람 한점에 떨어질 운명이면서 수천 수만의 낙엽들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나를 비웃고 있다. 두 손을 엉거주춤 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마스크 뒤에 숨은 입술을 이빨 사이에 끼워넣고 깨물어 본다. 무력감이 만들어내는 무기력이란 지금의 내 모습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무엇을 못하는 무력이고 강요한 적 없는 무기력이란 말인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끌고 왔는데 결국 또 주저 않아 바닥을 긁게 생겼구나 싶은 마음에 자꾸 바닥에 주저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구걸하고 싶어진다. 삶을 살아가는 지속하는 묘책이라도 있는지 열심히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하물며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에게라도...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과 하고 싶은 것을 제외한 것을 향하는 '해야하는 마음' 사이에 서 벌어지는 힘겨루기의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내 마음이 아주 잠깐 정신을 잃은 거겠지 생각한다. 지난 일 년 하고도 반 년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밖으로 돌아다니던 마음을 내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느라 애썼는데... 밖이 그리웠나 다른 것이 더 화려해 보였나 매일 똑같은 방구석이 지겨워졌나... 밖에서 휘둘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붓을 들어야 할까. 새벽마다 마음을 갈며 붓글씨에 집중했던 그 시간을 다시 데려와 꾸역꾸역 일어나 화선지에 먹으로 나의 길을 그려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거밖에 없는데... 어느 화가는 작품(作品)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구를 들지 않아도 머리로 생각하고 구상하는 단계까지도 작품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짓는 과정이 없이 만드는 과정만이 존재한다면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혼은 밖으로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걸 참지 못하고 권태라 여긴다면 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놔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웃풋이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실체없는 환영만 주무르는 것처럼 덧없이 느껴지는 건 확신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조바심이 만들어내는 단계적 고통인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게 하더니 지금은 미래의 앞선 좌절이 자꾸 무릎 꿇을라 말하는 것 같다. 오래 걸린다는 말만 되풀이 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참고 인내하며 고통 조차도 승화시켜야 한다는 영혼없는 말만 귓가에 빙빙 도는 듯하다. 자기 만족에서 시작된 일들이 누군가에게 잘 보여지길 바라는 지점을 희망할 때 나의 바닥을 들춰낼 줄이야. 이건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위로의 말들은 더이상 약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초심을 보려해도 이제 초심의 마음은 날 끌어 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궁여지책이라도 지금의 마음을 다시 깨울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게 뭘까. 생각한다. 다음 단계의 고통을 이겨낼 그게 무엇일까.
살아 있다는 건 매일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는 반복을 통해 확인되는 것일 테다. 직장인들이 일을 하고 있다 느끼는 건 '해야 할 일'을 갖고 직장에 나가며 퇴근을 하고 그 업무를 마무리 하는 반복을 통해 어느 정도의 구속 안에서 자유로울 때일 것이다. 학생들은 또 어떠한가. 공부가 좋아서 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 시절에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기 싫을 것을 꾸역꾸역 해내면서 학교에 가고 하교를 하고 해야 할 과제들을 하면서 또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구속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건 분명 자유였다. 끝도 없는 자유의 터널을 통과 했을 때 나에게도 구속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또다른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까. 모순이란 말은 어쩌면 끝도없는 평행선은 아닌 듯하다. 상황이 그리고 처지가 바뀌면 모순은 마주칠 수도 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난 무엇을 다짐하려 하는 걸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너른 바다를 바라보는데 나를 구속하는 무언가 있었다면 더 자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막연한 궁금증이 생겼다. 자유를 줬더니 자유가 뭐냐며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