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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Nov 26. 2021

어느 초보 아줌마 그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어제도 그랬다. 오늘도 그렇다. 하늘 높은 곳이 보이지 않는 아주 낮은 자세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짙은 회색 구름이 하늘 아래로 내려와 앉아 있다. 어제는 무척 바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이곳으로 왔다갔다 한 시간만 합쳐도 서너시간 될 듯하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매주 목요일 문화센터로 화구를 들고 차를 달려 제일 먼저 도착하곤 했었는데 어제는 무슨일인지 마음이 멈춰서서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외출할 때 입을 변변한 옷 하나 없는 엄마가 생각나 근처 아울렛에 갔다. 얼마전 엄마가 서울에 잠깐 온 적이 있었는데 아주 예전 생신 선물로 사드린 바람막이 하나 걸치고는 누렇게 될 때까지 그것만 입었는지 색도 형태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엄마 취향을 맞추기 어려워 옷 사드리는 건 거의 하지 않았던 세월이 말해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그렇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큰 수술 후 엄마는 간경화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로 갑자기 늙었다. 그러니 어떤 옷을 걸쳐도 남루해 보일 수 밖에 없다.


포근하고 색이 예쁜 스웨터를 하나 사야지 마음먹고 들어선 쇼핑몰에는 우리 엄마 몸에 걸칠 옷 하나 찾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엄마 옷을 고른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밭에 나갔다가 저녁이면 쓰러저 잠드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무슨 옷을 어떻게 사드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쌀쌀해지는 날씨를 생각해서 걸치고 다닐만 한 겉옷을 몇 벌 찍어 보냈더니 그런 옷은 많다며 볼일 보고 집에 가란다. 맥이 풀리면서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서 나와버렸다.


속초에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회화과 동기의 제안으로 그림을 두 점 그려 걸기로 했는데 그중 한 점을 판넬 작업을 하기 위해 화방으로 향했다. 뭐하나 건진 것 없어 허탈한 마음인데 화방에 놀러 가는 기분으로 운전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볼륨을 크게 올리고 팬텀싱어 노래를 이어서 들으니 그제야 나갔던 정신이 돌아와 조용히 나와 함께 한다. 남루하기로 말하면야 엄마의 옷보다 내 그림이 더하겠지.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에 파스텔을 손바닥으로 펴 발라가며 수도 없이 문질러 완성한 작품이니 자연스레 애착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화방은 판넬 작업이며 액자 작업이며 캔버스 작업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사이사이 보이는 작품들이 눈에 들어와 두리번 거리는데 해바라기 꽃잎 끝에 무당벌레가 빨간 날개를 펴고 살포시 앉아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그림 참 좋은데요. '그건 초보 아줌마 그림이에요' 라며 화방 주인의 말이 돌아온다. '초보 아줌마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내 정면에 놓여 있는 정사각형 50호 이상은 되어 보이는 작품을 가리키며 '현대 미술관에 들어갈 작품이에요. 거기만 들어가면 뭐 이 판에서는 알아주는 작가가 되는 거니까' 하신다. 이곳에서는 그런 작가들의 작품 판넬 작업을 많이도 하는 것 같다. 올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큰 작품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모습을 본다.


멋지네요. 하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보는 눈이 아직 없어서 그런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초보 아줌마 그림'에 자꾸 미안해져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또한 '초보 아줌마 그림'을 맡겨 두고 말이다. 내 작품도 누군가에게 '어느 초보 아줌마 그림'으로 소개 받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그걸 지금 가지러 가야 하는데 하늘이 궂다. 비도 부슬부슬 온다. 내게 그 작품은 비를 맞아서도 안되고 누군가의 발길에 차여서도 안되는 소중한 아가인데 지금 그저 그렇고 그런 남루한 모습으로 바닥에 세워져 있겠지. 마음이 쓰인다.


아빠의 말 때문에 속상했던 요즘 어떤 작품을 할 수 있나 생각하던 중 2011년, 10년도 더 지난 사진 한장이 떠올라 블로그를 뒤졌다. 시골집 앞에는 개울이 있다. 그 개울 너머 논두렁에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제멋대로 뻗은 나뭇가지에 살포시 앉은 눈이 아침 햇살에 빈짝거리는 모습이 차갑기는 커녕 따뜻해 보여 찍어뒀던 사진이었다. 아빠 때문에 속상한데 그 사진이 아른거렸던 이유는 그 나뭇가지 위로 번지는 아침 햇살의 기운 때문이었다. 차가워 보이고 제멋대로 자란 나뭇가지가 남루해 보이지만 그저 큰 나무라 여기며 바라보는 나는 나무 위에 빛을 뿌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 느낌은 나를 조금 위로해 줬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 아빠'다.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작품에 내제된 나의 소중한 보석. 누군가의 눈에는 '초보 아줌마 그림'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이제 나가봐야겠다. 내 작품을 찾으러...



이은하, 우리 아빠, 2021, soft pastel, 53 X 4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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