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 중에서.
수필은 난이요, 학이여,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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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랩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들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 피천득의 ‘수필’ 중에서-
98년에 동생에게 선물했던 수필집을 발견했다. 그때도 동생은 읽지 않을 것 같았는지, 단어들이 예쁘니 꼭 읽어보라고 편지까지 써두었다. 이십 년이 더 지나서 다시 펴 본 피천득의 수필은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대신 담아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역시 명필이다. 피천득이 정의한 수필의 색깔과 역할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외로움을 넘어 고독이 나의 호흡을 채우던 시간에 무엇이라도 혼자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던 시간이 찾아왔었다. 그때는 나도 서른 중반을 막 넘어설 때였고, 자존심만으로 행복한 척 하기에는 이미 내 분량을 넘어선 시간이었다. 그 지루하고 기다란 통로를 지날 때, 오랫동안 접어 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안네가 숨어서 일기를 썼던 것에 비유할 수야 있을까마는, 나도 그녀처럼 무엇인가 써야만 버틸 수 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다시 찾게 해 준 소중한 거름이 되어주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글 쓰는 길은 내게 기쁨이다. 그리고 오늘도 기쁘다. 먼지가 가득 쌓인 책장을 뒤지다가 오래된 좋은 책을 발견해서 이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좋다고 권했지만 사실은 내게 필요한 것을 돌려받은 것 같아서 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며오는 이 묘한 기분. 그것은 스무 살의 내가 알아보지 못한 먼지 쌓인 나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고, 한 곳에서 이십 년이나 나를 기다린 망부석 같은 나를 만난 기분이기도 하다. 솔직하지 못했기에 나를 찾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 것일까? 떨쳐내기 어려운 젊음의 치기와 미련함에서 오는 결과였을까?
돌고 돌아 더욱 내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양 같다. 나는 그러니 내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이겠지. 게다가 오늘은 내가 쓰는 글의 길, 결, 역할을 이토록 잘 정리해준 글을 재발견했다! 길고 험한 여정에 숙련된 안내자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누가 굳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한적한 길을 뚜벅뚜벅 끝까지 걸어갈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