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양하고 세심한 글감들이라니!

글 메모-피천득 [인연] 중에서.

by 굳찌

읽은 지 한 달이나 되었는데 다시 뒤적인다.

오래된 글이긴 하지만 요즘 글 같지 않은 정서, 단어, 소재들이 오히려 새롭고 참신해서 새 글인 것만 같다. 아니면 그렇기에 피천득이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인지도.


작가란 그런 것일까?

멀리 떠나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극단적인 경험을 하거나 이해받기 어려운 비상한 예술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의 움직임 하나, 눈짓 하나, 마음씀 하나를 집어 올려 무엇이 되게 하는 작업을 하는 자.


진부한 소재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유행되는 흐름에 비껴가 있는 나이를 탓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어야 한다.




<빠리에 부친 편지>

비를 거어주던 느티나무 아래, 그 돌 위에 앉았었습니다.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모시>

뭇 닭 속에 학을 보는 격이다. 모시는 청초하고 섬세하고 톡톡하고 깔깔하다. 아마 천사도 여름이면 모시를 입을 것이다. —— 곱게 모시옷을 입은 여인은 말끔하고 단정하고 바지런하여야 한다. 청초한 모시옷, 거기에 따르는 비취 비녀와 가락지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산뜻한 기쁨이었던가! 엄마 손가락에 비취가 끼어지면 여름이 오고, 엄마 모시 치마가 바람에 치기 전에 여름은 갔다.


<워터스키>

양복바지를 걷어올리고 젖은 조가비를 밟는 맛은, 정녕 갓 나온 푸성귀를 씹는 감각일 것이다.


<선물>

백청 한 항아리는 선물이 되어도 설탕 한 포대는 선물이 될 수 없다. 와이셔츠가 아니라 넥타이가 좋은 선물이 된다. 유럽에 갔다가 빠리에서 사 온 넥타이라면 더욱 좋다. 촌 부인에게 광목 한 통이 비단보다 더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양단 저고리 한 감이 정말 선물이 되는 것이다. (중략)

선물은 아름다운 물건이라야 한다. 진주 목걸이, 다이아 반지, 댄스 할 때 흔들릴 팔찌, 이런 사치품들도 좋은 선물이다.


<풀루트 플레이어>

바톤을 든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찬란한 존재다.


<여성의 편지>

어젯밤은 창을 열어놓고 잤습니다. 여기의 공기는 과실과 같습니다. 약보다 낫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책을 읽었습니다. 숲과 들과 산과 자갈 깔린 저 해안을 거닐고 싶습니다. 때로는 엷은 스웨이드 장갑을 끼고 도시에 가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카페에 앉아서 오래오래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언제나 자유롭고 언제나 인정이 있고 언제나 배우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편지)


<가구>

사람은 가구와 더불어 산다. (중략)

세전 지물, 우리네 살림에는 이런 것들이 드물다. 증조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 이런 것이 없는 까닭은 가난한 탓도 있고 전란을 겪은 탓도 있고 한 군데 뿌리를 박고 살지 못하는 탓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잘못에도 있다. (중략)

화려하여서가 맛이 아니다. 오래가고 정이 들면 된다.


<호이트 컬렉션>

맑고 찬 빛, 자혜로운 선, 그 난초같이 휘다가 사뿐 머문 입매!


<전화>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용돈>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이런 돈을 용돈이라고 한다.

주말이 되면 내 용돈에서 일주일 분 칠백 원을 넣고 나간다.... 찻집에는 가끔 간다. 용돈으로 물건을 사는 일은 없다. 어려서 전재산을 다 주고 값진 장난감 하나를 사고는 한 달 동안 돈 고생을 한 일이 있다. 그 후로는 용돈으로는 절대로 물건을 아니 사게 되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쓰는 날이라도 칠백 원을 다 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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