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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썬 Jul 04. 2021

나이 스물 셋에 저지른 첫 가출

    집 떠나 산 지도 어느새 4년차에 접어들었다. 새내기 시절엔 기숙사, 2학년 땐 학교 앞 조그마한 자취방, 3학년 땐 미국에서 잠깐,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선 살짝 떨어진 나만의 원룸.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처럼 훨훨 하고픈 거 다 하고 살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그렇게 내멋대로 한 페이지씩 넘겨가며 지내던 나날들을 뒤로 하고 어쩌다보니 고향집으로 내려와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쓰던 책상, 침대, 물건들까지 전부 익숙함으로 짙게 물들어 있는 오래된 나의 방에서 나에겐 무언가 편안함보다는 답답함이 더 크게 와닿았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로 쉬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든 뭘 하든 생산적인 일을 끊임없이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옥죄어왔다. 가만히 누워있는 내가 한심해보일 것만 같았다. 그냥 집에서 밥 얻어먹는 아직도 걱정에 불평불만 하는 갑갑한 아이로.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쿵쿵 닫히는 문, 집안을 감도는 어색한 조용함,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일상. 


    나는 도망쳐야했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내 머릿속과 터져버리기 직전인 내 속을 달래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인생의 끝이 보이는 이 초라함과 죄책감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단 하루여도 좋으니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생애 첫 합법적 가출을 결심했고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호텔로 주저없이 나를 숨겼다.


    체크인과 동시에 그 순간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을 한가득 주문하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 힐링의 시작이다. 해운대 바닷가의 짭짤하고 무거운 공기로 한껏 찝찝해져 있던 몸은 금새 뽀송해졌다. 집에 있었으면 에어컨은 정말 덥거나 습한 날씨가 아닌 이상 켤 엄두도 못 냈을텐데 내가 원하는 온도의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지 모른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그만 마시라는 잔소리 하나 없이 일분일초 나만의 것이였다. 티비를 켰더니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딱딱 맞아떨어진 날이다. 내가 보는 프로그램이 다른 가족의 취향과 맞지 않아 다들 폰만 보다가 어느덧 티비가 텅 빈 오디오를 채우는 역할만 하는 순간이 집에선 생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괜히 눈치를 봤었다. 이 곳에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실컷 웃고 노래도 따라부르고 중간에 홀짝 한 번, 한 입 크게 한 번. 잠이 오면 스르륵 눈도 잠깐 붙이고.


    힐링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렀고 그렇게 긴 해도 어느덧 자취를 감췄다. 밤은 내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라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밤은 고민만 더 많아지는, 우울함에 젖어버리는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하루종일 발가락 끝에 전율이 흐를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씩씩하게 내 생각과 고민의 굴레에 직접 발을 들여보았다. 언젠간 마주해야 할 문제들이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왜 내가 내 방에서, 우리 집에서 그리도 괴로워했는지 얼핏 답이 보였다. 내 방은 치열함의 공간이다. 학창시절 내내 보냈던 방이다보니 나의 피나는 노력의 기록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야자시간을 끝내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왔을 때도 이 방에서 몇 시간은 더 공부하고 잠에 들었다. 그랬던 곳에 속편하게 지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큰 돌덩이를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그냥 공부만 우직히 했으면 됐던 그 날들과 달리 지금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하는 건 뭔지, 하고자 하는 게 현실성이 있는지 등등 생각할 게 너무 많다. 생각을 마치면 또 끝없는 경쟁 속에서 이겨내야하는데 지금의 난 그 생각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난 도대체 뭐하고 먹고 살지?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러다 평생 부모님께 용돈 받으면서 사는 건 아닐까? 노력으로 가득 찼던 방이었는데 지금은 고민한다는 핑계로 노력할 게 없다. 뭘 시작해야 노력이란 걸 하지.


    물음표로 가득한 밤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울적하진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엉망진창 나답게 보냈던 하루 덕분인지.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을 텐데 왠지 모르게 힘이 났고 그냥 기분이 좋았다. 굳이 저 물음표에 대한 대답을 성급하게 내릴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다시 돌이키며 살다보면 저절로 답이 나오겠지. 어떻게든 살겠지. 마음만 급했던 지난 날들에서 살짝 벗어난 기분이었다.


    스물 셋, 더 큰 사회로 뛰어들 준비를 해야할 나이. 삶의 부담을 오롯이 혼자 이겨내야하는 아픈 싸움의 나이. 자꾸만 눈칫밥을 먹게 되는 나이. 남들보다 조금 더 버겁게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나 자신이지만 내 인생 첫 일탈이자 가출인 혼캉스는 나의 싸움에 활기 한 스푼을 선물해줬다.


    혼캉스. 아마 종종 훌쩍 떠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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