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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DAK 노닥 Feb 18. 2018

어떻게 할래, 늑대 할래? 인간 할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 아이 아메와 유키> 진짜 주인공은?

얼마 전, 늑대아이를 다시 한 번 시청했습니다.

늑대아이는 말 그대로 늑대인간의 두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하나는 늑대인간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게 되고 두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들의 이름은 유키와 아메입니다. 일본어로 ‘눈’과 ‘비’라는 뜻입니다. 두 아이는 흥분하면 늑대처럼 변합니다. 귀가 나오고 털이 자라며, 손톱이 무시무시하게 자랍니다. 다른 매체에서의 늑대인간들(트와일라잇, 언더월드)보다는 정감있고 귀여운 늑대입니다.

늑대라고 해도 너무 귀여운 녀석들


극 중에서 동생 아메가 울면서 엄마한테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다 늑대를 싫어해? 동화책을 보면 언제나 늑대는 나빠.”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는 어떤 세계든, 어느 시대든 있었습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미워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작정 싫어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심지어는 늑대처럼 자연의 일부도 인간의 ‘편리한 세상’을 위해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혐오의 대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동물부터 시작해서 인간과 국가까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자아 실현의 대립을 조화로 이끌려는 하나(엄마) 의 노력입니다.


늑대아이에서의 관점 포인트는 ‘자아 실현’에 대한 부분입니다.

늑대아이 유키와 아메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 수록 자신이 인간인지 늑대인지 모를 상황에 빠집니다. 흥분하면 늑대가 되고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방 안에서 발톱을 세워서 온 집안을 헤집어 놓기도 하고 이빨을 갈기 위해서 탁자의 기둥을 못쓰게 만들기도 합니다.

늑대가 된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늑대인간을 키우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는 일 조차 하질 못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서 동물을 키운다는 명목 아래 쫒겨납니다. 마침내 시골로 이사할 결심을 가진 하나는 아직 자기가 얼마나 특별한지 모르는 두 아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래? 인간 할래? 늑대 할래?"


저는 이 질문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 하나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자 늑대인 아이들의 자아를 실현시켜주기 위해서 아이들이 늑대의 삶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는 무모하게 시골로 이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시골에서, 자연에서, 사람들 틈에서.
야생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동물원의 늑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가 원하는 늑대아이의 상이 완성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늑대로 변해서는 안돼. 사람들은 놀라 자빠질거야.’ 걱정이 앞서 하나가 말했지만 여기서 우리들은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나가 원하는 늑대아이의 상은 누나 ‘유키’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유키는 처음에 본능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늑대로서의 자아를 실현하는 듯 했으나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적인 인간의 삶을 원하게 됩니다. 더이상 본능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인간의 삶을 선택합니다.

누나 유키도 고민하며 삽니다. 자기의 정체를 숨길지 아니면 드러낼지.
유키는 소헤이에게 고백한 다음 성장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더라도 부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인간으로 안전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 세상 속에서 차별받지 않는 엄연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유키와는 달리 남동생 아메는 어렸을 때 인간적 삶을 추구합니다.

시골로 이사를 갔을 때도 부정적이었습니다. 적응을 쉬이 하지 못한 아메였지만 어느 순간에 아메는 야생의 삶에 대해서 확신을 품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연약했던 자기의 모습은 버려두고, 산속의 여우 선생님의 후계자가 되어 산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야생의 삶을 선택합니다.

아메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가 경험한 즐거웠던 점을 신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의 모습은 복잡합니다.


어느덧 마지막 장면에 와서 하나는 두 자녀의 엇갈린 자아 실현에 갈등하게 됩니다.

태풍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아메는 엄마의 말을 어기고 산을 지키러 올라갑니다. 엄마 하나는 그런 아메를 적극적으로 말리기 위해 쫒아갑니다.

발이 헛디뎌 하나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환상 안에서 죽은 자신의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 묘하게도 아메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하나는 ‘이제 아이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메는 걱정 마. 다 컸어. 자신의 세계를 찾은 거야.’

이 장면은 아메는 산을 지키러 늑대의 삶을 선택하지만 ‘언젠가’ 인간의 삶도 선택할 거라는 믿음도 들게 되는 장면입니다. 아메는 아버지처럼 언젠가 인간의 삶을 선택해 언제든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잘 살아! 건강히!


아메가 하나를 위험에서 구해준 뒤, 산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하나는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적이 없는데...”라고 울먹이는 장면은 역시 부모님들의 모든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합니다.

우리에게 다 쏟아부어도 우리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여겨주시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늑대의 삶은 죽음의 삶입니다.

극중 초반에 하나의 남편인 늑대인간이 죽은 모습을 왜 보여주었을까요? 경고입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저렇게 쉽게 비극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어도 ‘늑대가 왜 여기 죽어있지?’ 라고 이상하게 여길 뿐 동네 신문에도 나지 않습니다. 늑대라는 것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 야생을 선택한 아메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자아 실현과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지도자입니다.

산에는 언제나 여우 선생님 대신 자리를 물려받을 지도자가 필요하며 인간에게 위협받고 있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 또 길을 잃은 인간을 도와주기 위해,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올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무거운 짐을 아메가 선택한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 아메는 산 속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화답하는 하울링을 보여줍니다. ‘잘 살아야 해’ 라는 희망 가득한 하나의 외침.


“어떻게 할래? 인간 할래? 늑대 할래?”

라는 말은 결국 아메와 유키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자식들은 언제든 부모가 도와주지 않아도 자아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질문은 하나가 스스로에게 한 말입니다.

“어떻게 할래? 인간이라도. 늑대라도.” 아이들이 어떤 자아를 선택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느냐는 엄숙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부모가 됩니다. 자, 이제 준비할 때입니다.





“어떻게 하실겁니까? 인간이라도, 늑대라도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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